‘어머, 우리 이야기네’
지영란(소비조합)/기장신앙촌김영정 관장님의 체험기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무더기 심방 중 이제현 집사님네 집에 심방을 갔는데 어린 아이들만 놓고 일을 하러 간 그 집사님네 방에는 아이들이 오줌을 싸 지린 내가 나는 포대기가 깔려있었고, 그 방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그 지린내 나는 포대기 아래 손을 넣고 기도하신 후 금일봉을 두고 나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자라면서 어머니에게 많이 들었던 바로 우리 집 이야기입니다. 저는 김영정 관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 이야기를 더 들려주시는 관장님은 다른 집들은 대문에 손을 짚으시고, 혹은 문설주에 손을 짚으시고 축복을 하시고 가시는데 그때 저희 집에는 하나님께서 큰 키를 숙이시며 방에 들어오셔서 축복을 해주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도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저는 그 어머니의 뜨거운 신앙으로 지금까지 따라오고 있습니다. 축복 받을 기회가 있어도 자식에게 양보하시며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소망하셨습니다.
입사생을 부르실 때 1987년 8월 4일 1차 입사생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저를 위해 늘 기도하시며 축복일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오시며 용기를 주시고 힘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말년엔 제가 쥐어주는 용돈을 받는 재미도 크다고 하셨습니다.
1999년 성신사모일을 전후한 어느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살면서 한번도 시신을 본 적이 없는 저는 내 엄마인데 무서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며 올라갔습니다. 신앙촌에서 떠간 생명물을 마시게하고 축복 크림을 발라드렸습니다. 얼굴이 피어나가기 시작하는데 입술은 립스틱을 바른 듯 붉고 얼굴은 볼터치 화장을 한 듯 예뻤습니다. 초상집은 분명한데 그 어디에도 침울하고 암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도문 그대로의 상황이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동생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를 유난히 잘 따르던 고종사촌은 “고모한테 화장시켜놨다”며 예쁘다고 하더니 베게를 갖다 놓고 밤새 아예 관 옆에 누워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자기 엄마라 해도 무서워 옆에 가길 두려워한다고 했는데 저희 집은 그런 말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저는 1987년 8월 7일 첫 출근을 한 이래 계속 신앙촌에서 근무하다가 2006년 소비조합으로 나왔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대로 하나님의 참된 일꾼, 바른 일꾼이 되어 더욱 용기있게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