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자본주의
박효종 /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이명박 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따뜻한 자본주의’를 제창했다. ‘따뜻한 자본주의’는 멋있는 말이긴 하나, 혹시 형용모순과 같은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라고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경쟁사회의 이미지가 크다. 그러기에 1등만 기억할 뿐 2등은 기억하지 못하는 매정한 사회다. 2등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면, 3등, 4등…, 항차 꼴찌는 더 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따뜻하다고 하다니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면 21세기 한국형 자본주의라면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진화한 모습, 온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옳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아무리 성공한 사람들이 있어도, 또 아무리 효율적이며 생산성 높은 선진경제가 되어도 시장경쟁에서 탈락하여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생산성과 책임감, 근면을 강조하는 것 못지않게 경쟁에서 낙오되어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이 ‘따뜻한 자본주의’ 사회다. 장애인, 고령자, 아이들에게는 물론, 시장실패자에게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며,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공동체에 ‘온정’과 ‘배려’가 강물처럼 넘쳐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일찍이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쓴 막스 베버도 진정한 자본주의는 신의 소명의식에 의하여 삶을 가꾸어가는 사회로서 탐욕이 판치는 ‘천민자본주의’와는 구분된다고 강조하였다. 진정한 자본주의라면 양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을 신봉하기보다 배품과 배려를 원칙으로 삼는 사회다. 항상 ‘갑’이 ‘을’을 지배하고 강자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약자를 괴롭히는 사회야말로 천민자본주의 사회가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한국자본주의는 과연 어떤 자본주의였는지 치열한 반성이 필요하다.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고칠 것은 고쳐야한다. 한국자본주의는 시장의 ‘을’이 품위있는 삶을 살도록 배려하는 사회였나. 혹시 우리는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라든지, “사회적 약자는 항상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을 일상화한 것은 아닌가.
따뜻한 자본주의는 이타주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타주의 매력과 강점에 대한 고전적 통찰은 티트머스(R. Titmuss)가 제시한 헌혈과 매혈의 대비에서 인상적으로 나타난다. 헌혈(獻血)과 매혈(買血)을 비교하면 매혈은 ‘시장관계’이며 헌혈은 ‘선물관계’의 전형이다. 헌혈자는 아무런 대가 없이 혹은 우유나 주스 한 잔 정도 받고 자신의 피를 거저 주는 반면, 매혈자는 돈을 주고 피를 파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의 질에 관한 한, 헌혈된 피가 매혈된 피에 비하여 양질이며 훨씬 덜 오염 되어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매혈자는 돈 때문에 피를 파는 사람이므로 돈이 항상 필요하게 마련인 마약중독자나 알콜중독자일 가능성이 농후한 반면, 헌혈자는 돈 때문에 피를 뽑는 사람이 아니므로 정신만이 숭고할 뿐 아니라 신체 건강한 사람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헌혈은 이타주의라는 숭고한 정신이외에도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공급된 매혈보다 경제적 효율을 보장한다. 그렇다면 우리 자본주의도 경제적 교환관계만이 능사가 아니라 약자를 배려하는 이타주의가 약동할 때 그 지속가능성과 품위를 보장한다는 점을 깨달아야한다. 바로 이것이 한국자본주의에 온정이 흘러야하는 이치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