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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어둠을 거둬주시고 은혜를 허락해주신 하나님

기장신앙촌 이기순 권사 편
발행일 발행호수 2593

기장신앙촌 이기순 권사

저는 1939년 충청남도 금산군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내던 중 어머니께서 막냇동생을 낳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이듬해에는 6‧25전쟁이 발발해 아버지마저 전쟁 통에 목숨을 잃게 되셨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어도 집에는 조부모님과 든든한 오빠들이 있어 먹고 사는 일이 크게 어려워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연이어 부모님을 잃고 나니 깊은 슬픔과 외로움이 가슴을 파고들었고, 얼마 후 둘째 오빠마저 시골에서 살기 싫다고 집을 나가 버리면서 제 마음은 더더욱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제 사정을 아는 동네 사람들이 교회에 다녀 보라고도 했지만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신을 믿습니까? 저는 안 믿습니다”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대전전도관에 오라는 둘째 오빠의 편지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1956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집을 떠났던 둘째 오빠에게 편지가 한 통 와 있었습니다. 내용인즉슨 집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올라간 오빠가 이번에 대전으로 내려오게 된다며 저보고 대전에 와서 만나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편지에는 오빠가 홀로 고생하며 공사판을 전전했다는 것과 몸이 상해서 많이 아프다는 것, 그리고 서울에서 전도관이라는 곳에 다니고 있으며 이번에 대전으로 내려오는 것도 대전전도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아픈 오빠를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에 편지에 적힌 날짜에 맞춰 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습니다.

물어물어 찾아간 대전전도관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전도관 사람들은 힘차게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불렀는데, 예배에 처음 참석해 본 저는 그 광경이 생소하기도 하고, 찬송 부르는 법도 몰라서 그저 멋쩍게 손뼉만 쳤습니다. 반면 둘째 오빠는 뭐가 그리 좋았는지 집회가 끝나고도 3일 동안을 대전전도관에서 머물면서 교인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찬송도 부르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주무시는 것처럼 편안히 숨을 거뒀습니다.

저는 오빠가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그리도 좋아했던 전도관에 오빠의 장례를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대전전도관에 연락하니 곧바로 전도관 교인들이 물통을 들고 저희 집에 오셔서 오빠의 시신을 정성껏 닦아 드렸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한참 예배를 드리는데 전도관 교인들이 이슬이 많이 내린다며 무척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집안 어느 곳을 둘러봐도 이슬 같은 것은 안 보이는데 ‘도대체 무슨 이슬이 내린다는 걸까?’ 싶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갈 무렵 오빠의 모습을 본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오빠의 얼굴이 뽀얗게 피어나고, 팔다리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몇 해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얼굴도 시꺼메지고 몸도 뻣뻣하게 굳어서 차마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무서웠는데, 오빠는 마치 목욕을 마치고 편안히 잠든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같이 지켜보던 동네 사람들도 매우 놀라워했고, 몇 분은 알코올로 시신을 닦아서 그렇다며 수군거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도관 교인들이 직접 가져온 물로 오빠의 몸을 닦는 것을 봤는데, 거기서 알코올 같은 독한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을뿐더러, 알코올로 시신을 닦아서 피부색이 뽀얗게 되거나 팔다리가 부드러워진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살아 있을 적보다 훨씬 밝고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은 오빠를 보니 전도관은 정말 특별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고, 마지막 순간을 전도관에서 보내고 싶어 했던 오빠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도관 교인들이 오빠를 깨끗이 닦아 주었던 그 물이 박태선 장로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다시 찾아간 전도관서 기쁨의 은혜 느껴

얼마 후 대전전도관에서 다시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는 혼자 전도관을 찾아갔습니다. 처음과는 달리 예배 시간에 부르는 찬송이 그토록 간절할 수 없었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죄 짐을 지셨네’ 하는 찬송을 부를 때는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무렵, 예배를 인도하시던 분이 단에서 내려와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시며 머리에 가볍게 손을 얹으시며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손이 제 머리에 닿는 순간, 목에서부터 배 속까지 박하사탕을 먹은 것보다 더 시원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코에서는 세상에서 맡아 보지 못했던 진한 향기가 맴돌았고, 가슴은 상상도 못 할 기쁨으로 가득 차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저는 그제야 안수를 해 주신 분이 누구신지 궁금해졌습니다. 힘차게 찬송을 인도하시고, 사람들의 머리에 안수를 해 주신 훤칠한 신사분은 바로 박태선 장로님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국에서 집회를 하시고 전도관을 세우시며 굉장히 유명하신 분이었는데 교회에 관심이 없던 저만 몰랐던 것입니다. 또 제가 맡았던 진한 향기와 가슴 가득 차오르는 기쁨이 박 장로님께서 주시는 은혜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이 마냥 좋아서 집회가 끝난 후에도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계속 전도관 앞을 배회했고,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고 해가 저물어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대책 없이 전도관 문 앞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한 권사님이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왜 집에 가지 않느냐고 묻는 권사님께 ‘은혜를 받고 나니 전도관에서 떠나고 싶지가 않아요. 저희 집 주변에는 전도관이 없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께서는 본인은 서울중앙전도관(이만제단) 부인회장이라며 서울 원효로에 살면서 전도관에 열심히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처음 보는 분이었지만 인자하고 친절한 권사님을 만나고 보니 이분과 함께 서울에 가서 매일 전도관에 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권사님께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저만 괜찮다면 권사님 댁에서 생활하며 전도관에 다닐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나이 열아홉 살로 이미 성인이었던 저는 상경을 결심하고 권사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1957년도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안수를 받는 순간 목에서부터 배 속까지
박하사탕 먹은 것보다 더 시원해지고,
세상에서 맡아 보지 못한 향취 맴돌아
어둡고 쓸쓸했던 마음에는 상상도 못 할 기쁨이 차올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임을 깨닫고 전도관에 다니게 돼

은혜를 간구하며 달렸던 하루하루

부인회장님은 저를 한 식구같이 대해 주셨고 일요일이면 같이 이만제단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실 앞자리에 앉기 위해 제단 문이 열리기 전부터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 일요일만 되면 제단 입구에서부터 아래쪽 버스 정류장까지 길게 늘어선 줄의 끝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저도 그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 긴 줄을 기다리면서도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조금도 지루하거나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예배실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은혜가 연결되어 향취가 맡아지니 어찌 그 기다림이 지루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 처음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눈물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집에 가는 길이 땅을 밟는 것 같지 않고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했습니다. 또 집에 도착하면 집 안 어느 곳을 가도 계속해서 향취가 연결되어 며칠씩 지속되곤 했습니다.

평일에는 박태선 장로님을 따라 구역별로 예배를 드렸는데, 수백 명씩 무더기로 따라다닌다 하여 무더기 심방이라고 불렸습니다. 각 지역마다 넓은 장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박 장로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은혜를 받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집회를 따라다니며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는 것이 그렇게 신나고 재미있었습니다. 이만제단에 다니며 무더기 심방을 따라다니던 그때가 지금도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됩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후로 어둡고 쓸쓸하기만 했던 유년 시절의 그늘이 전도관을 다니며 씻은 듯 사라졌고, 은혜를 받은 마음에는 환하고 따스한 빛이 가득 비치는 듯했습니다. 그 하루하루가 기쁘고 좋은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사신앙촌에서 일할 건설대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건설은 해 본 적이 없어서 망설이다가 1958년 여름에 소사신앙촌에서 노구산 집회가 열린다고 하여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목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감동과 환희가 넘쳤던 노구산 집회. 그날 저는 신앙인들이 모여 사는 신앙촌에서 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집회에 참석한 후 소사신앙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 들어간 저는 한창 건설 중이던 오만제단 작업 현장에서 일을 하고, 제단이 완공되고 나서는 신앙촌 주택을 건설했습니다. 모래 질통을 지고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며 일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꼈고, 시멘트와 자갈, 모래를 섞어 콘크리트를 만드는 법, 벽돌을 쌓는 법 등 다양한 기술도 배웠습니다. 1962년 7월에는 감사하게도 덕소 건설대로 선발되어 두 번째 신앙촌을 건설하는 일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현장에서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진하게 향취가 맡아지는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하나님께서 환히 웃으시며 저희 쪽으로 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건설대원들을 자주 불러서 안찰해 주셨는데, 받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고 몸이 훨훨 나는 듯 가벼워져서 더욱 힘차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저희와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힘들지도, 피곤하지도 않고 즐겁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지어진 덕소신앙촌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덕소신앙촌 장미가 있는 주택. (1962년경)

축복받은 땅에서 생활할 수 있음에 감사

이후 부산으로 내려와 기장신앙촌 건설을 마치고 장유 공장에서 근무했습니다. 장유 공장에서 30여 년간 보람을 느끼며 근무하다 2009년 은퇴한 후, ‘어떻게 하면 남은 시간을 가치 있게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잘 알고 지내는 소비조합 사장님의 신앙촌상회에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사장님은 주로 신앙촌 제품을 배달하는 일을 맡고, 저는 상회에 오는 손님들을 응대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다가가 반갑고 친절하게 맞이하며, 제품을 설명하면 고객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게 제품을 구매해 가셨습니다. 단골손님도 생기고, 매출도 오르니 일하는 기쁨과 재미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일선에서 물러나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신앙촌 여성회 합창단이 되어 한창 즐겁게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소녀 시절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터라 정식으로 발성을 배우고, 노래를 익히는 시간이 정말 행복합니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슬픔으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제가 하나님을 만나 축복받은 땅 신앙촌에서 여든이 넘은 오늘까지 기쁘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은 꿈만 같습니다.

제 마음의 어둠을 거둬 주시고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어 오늘도 무릎을 꿇고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날들이 되도록 하루하루 말씀대로 살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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