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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윤 전직 관장 편 ⑤ 하나님 은혜 보내 주시는 시간에 강한 체험

하나님 은혜 보내 주시는 시간에 강한 체험
발행일 발행호수 2299

4.19 혁명 시위대와 출동한 탱크. 4.19 혁명으로 이기붕 일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오만제단에 부임한지 석달 만에 제단 건물이 완공되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만제단 건립을 위해서 모든 식구들이 힘썼기에 빨리 완공되었나 봅니다.

저는 오만제단의 은혜가 막히면 전국 제단의 은혜가 막힌다는 말씀을 들은 이후 식사하는 시간이나 우리 식구와 대화하는 시간 외에는 늘 기도와 긴장 가운데 지냈습니다. 밤에 잘 때에도 반듯이 누워 편히 자지 못하고 모로 누워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내다가 잠들곤 하였습니다.

영어의 몸으로 계시면서도 전국의 식구들을 위해서 은혜보내주신다는 하나님을 밖에 있는 가지들은 눈물겨운 심정으로 사모했습니다. 더욱이 오만제단에 서는 저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루에 한 번씩 은혜를 보내주신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다시금 눈시울을 적시면서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은혜를 보내주시는 시간에는 생수가 가슴에 박하사탕 수십 개를 먹은 것처럼 시원하게 임했었습니다. 그때 ‘너희가 나를 믿으면 생수가 강같이 흐르리라(요한복음 7:38)’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식구들은 제가 은혜가 많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속으로 웃으며 제가 기도를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액을 보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식구들은 모르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더 은혜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애썼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법정에 출두하실 때마다 참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재판장 앞에 서시는 모습을 저는 차마 눈을 뜨고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 고된 시련의 기간은 우리 식구들의 고통이었고 괴로움이었습니다.

1년 4개월의 억울한 옥고를 치르시고 1960년 3월 26일 하나님께서 출감하셨습니다.
그해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하나님을 괴롭히던 박마리아 일가는 그의 아들 이강석에 의하여 모두 사살당하는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박마리아 가족의 네 무덤이 하루 아침에 망우리 공동묘지 한쪽 구석에 쓸쓸이 묻히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 이전에도 자유당 시절에 민주당에서 신익희씨가 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의 일입니다. 신익희씨는 한강모래사장에서 유세할 때 거의 30만명이나 모이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신익희씨는 유세할 때 노골적으로 자기가 당선되면 박태선 장로를 손보겠다고 공공연히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유세차 광주로 향하던 중 기차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옥중에 들어가시기 전에 전라도 화순과 남원 지방에 산판과 탄광을 운영하셨습니다. 그 인원이 무려 4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우리 전도관의 신앙의 첨병들이었습니다. 누구도 그분들의 신앙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열심이었던 분들이었습니다.

산판과 탄광에서 일하던 분들은 소사신앙촌에 복귀하여 주택과 공장건립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때 책임자는 장세호 집사와 김택곤 장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이 되시자 일부 불순한 종교계 인사들이 신앙촌으로 들어오는 물자를 막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중 몇몇은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장세호 집사와 김택곤 장로께 들은 바가 없었기에 처음엔 저도 그분들을 원망하였습니다. 제가 알았다면 특별연보를 걷어서라도 하나님 나오실 때까지라도 있게 했을 텐데 참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동안 신앙촌의 모든 공장은 정지되거나 반 정도밖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영어에서 나오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장을 다시 정상궤도로 이끄시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를 쓰셨습니다.
오만제단에서 저는 다시 서대문전도관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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