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잊을 수 없어”
제주 일도교회 장명이 권사 신앙체험기 (2. 끝)<지난호에 이어>
어느 날, 오전 내내 세탁소에서 일한 후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처음 보는 젊은 신사 두 분이 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제주에 사는 장명이 씨가 맞냐고 물으셔서, 그렇다고 답하니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들은 제주도에 전도관을 개척하기 위해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두 전도사님들은 막상 제주에 교회를 개척하러 왔으나 연고도 없고, 제주 지리도 몰라서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넓은 공터에 천막이라도 치고 예배를 드리자고 의견을 모아가던 찰나 부산 당감동 전도사님이 저를 찾아가 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주에도 전도관을 지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너무나 기쁘고 설레서 최선을 다해 전도사님들을 돕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날부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식으로 전도관이 지어지기 전까지 임시로 예배 드릴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전도사님들께 길을 안내하고, 지금보다 훨씬 심했던 제주 사투리를 통역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는 교통편도 좋지 않아서 멀고 험한 길을 걸어 다녀야 했지만, 저는 제주 전도관이 생긴다는 기대감으로 즐겁기만 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가는 곳마다 임시 제단이 쉽게 구해졌다는 것입니다. 제주 시내에서는 전도관에 다니는 동생을 둔 할머니가 본인의 집을 흔쾌히 내어주셨고, 애월읍에서는 저희 고모가 살던 집의 아래층 전체를 빌려주며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천읍에서는 큰 길가에 있는 집을 수월하게 임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총 3개의 임시 전도관이 제주도에 생겼고, 저희는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이루어 주신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감사드렸습니다. 이제 막 생겨난 제주 전도관에서는 활발한 전도 활동이 펼쳐졌고, 저는 3개의 임시 전도관을 돌며 부족한 일손을 도왔습니다.
조금 지나니 주일학생도 생기고 여청들도 점차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반면, 제가 세탁소보다 전도관에 가는 시간이 많아지자 오빠는 전도관에 가지 말라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은혜를 직접 체험하고, 구원의 진리가 전도관에 있음을 깨달은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길을 따라가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1967년, 제가 스물두 살의 나이로 제주도를 떠나 덕소신앙촌으로 가게 된 이유였습니다.
덕소신앙촌에 가보니 메리야스, 담요, 이불, 양재, 슬레이트, 피아노, 제강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많았습니다. 저는 직조공장에 입사하였는데, 당시 신앙촌 이불의 인기가 높아서 제가 일하는 직조공장도 바쁘게 돌아갔습니다. 거기서 베를 짜는 방법을 배웠는데, 원단이 착착 짜여지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서는 전도관 교인들이 모여 살며, 신앙을 지키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행복했습니다.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샘물 솟듯 하니 즐겁게 웃으며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직조 공장이 확장 이전하게 되면서 저는 그 사이에 건설대로 지원하여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건물을 짓던 도중 쇠 파이프가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의식을 잃었고, 건설대 언니들은 리어카에 저를 싣고 급하게 하나님 댁으로 달려갔습니다. 쓰러진 저를 본 하나님께서는 한참 동안 안찰을 해주셨고, 잠시 후 저는 의식을 되찾고 깨어났습니다.
겨우 정신은 차렸는데 머리는 계속 어지러웠고, 코와 입안에서 피 냄새가 났습니다. 그 뒤로도 며칠간 하나님께 강한 안찰을 받았는데, 정확히 3일이 지나자 어지러움은 사라지고 피 냄새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회복되어 이전과 다름없이 생활하는 저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신기해했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즈음, 오빠가 둘째 동생과 저를 보러 덕소신앙촌에 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빠에게 혼나지는 않을까 긴장하고 있었는데, 덕소신앙촌 이곳저곳을 둘러본 오빠는 의외로 별말 없이 잘 지내라는 인사만 남기고 제주로 돌아갔습니다. 아마 외신에 소개될 정도로 아름다운 덕소신앙촌과 즐겁게 지내는 제 모습을 보고 마음이 놓여서 안심하고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오빠는 전과 달리 전도관과 신앙촌 이야기가 나와도 크게 반대하거나 화를 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1970년에는 기장신앙촌 건설을 위해 기장으로 내려갔습니다. 기장은 땅이 매우 질어서 기둥 하나 세우는 일도 쉽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현장을 진두지휘하시며 함께해 주시니 항상 든든하고 힘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도중 실수로 시멘트에 다리가 깊이 빠져서 정강이에 시멘트가 묻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계속 일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시멘트가 묻었던 자리에 상처가 생기면서 심하게 진물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상처가 생기니 쉽게 낫지 않아 고민이 되었는데, 건설대 언니가 하나님께 제 사정을 말씀드려서 축복을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언니와 함께 하나님 댁을 찾아가 상처를 보여드리니 “왜 이렇게 됐어.” 하시며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진물이 줄줄 흐르던 상처는 다른 사람이 봐도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아물었습니다.
그 후 저는 개인 사정으로 1970년대 후반에 다시 제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의 정체를 벗기시고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던 놀라운 그 은혜가 하나님이 아니시면 보여주실 수 없는 하늘의 권능이었음을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오랜 투병 생활로 몸이 구부러진 채 불편한 자세로 돌아가신 권사님
생명물을 입에 넣어드리고, 생명물을 적신 수건으로 몸을 깨끗이 씻겨드리자
굳어있던 권사님의 팔다리가 부드럽게 움직이고, 굽었던 몸도 곧게 펴져
아름답게 피어난 권사님을 보며 하나님 은혜에 더욱 깊이 감사드려
2000년에는 제주 일도 천부교회가 신축되었습니다. 처음 제주도에 전도관을 세우기 위해 내려오셨던 전도사님들과 여기저기 교회 건물을 알아보러 다니던 기억이 떠올라 감회가 무척 새로웠습니다. 도배 기술을 배운 적이 있던 저는 새로 건물을 신축할 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교회 내부 곳곳의 벽지를 직접 시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도교회에 전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껏 도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 지어진 일도교회는 당시 새로운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져 제주 제민일보에 아름다운 건축물로 소개된 적도 있고, 대학교 건축과 학생들이 공부를 위해 사진을 찍어 가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일도 천부교회는 저의 기쁨이자 자랑이기에, 매주 교회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하나님의 권능을 다시금 깨달은 일이 있었습니다. 올해 4월 서귀포 천부교회의 권사님이 돌아가셔서 입관 예배를 드리러 가게 되었습니다. 권사님은 오랜 투병 생활로 몸이 몹시 말라 있었고, 몸을 구부린 채 불편한 자세로 돌아가셔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윽고 입관예배가 시작되어 관장님께서 생명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고인의 입에 넣어드렸습니다. 생명물이 어찌나 잘 들어가던지 ‘권사님이 투병 생활을 하며 그동안 못 드셨던 생명물을 원 없이 드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또 생명물을 적신 수건으로 권사님의 몸을 깨끗하게 씻겨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굳어있던 권사님의 팔다리가 부드럽게 움직이고, 굽었던 몸도 곧게 펴졌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니 까맣고 말라있던 권사님의 얼굴은 뽀얗게 피어났고, 입술과 뺨에는 혈색이 감돌았습니다. 미소를 띤 채 잠이 든 듯한 모습은 무척 편안해 보였습니다. 가장 신기한 것은 권사님 얼굴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이슬이었습니다. 천부교식으로 입관 예배를 드리면 돌아가신 분의 얼굴에 이슬이 맺히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아름답게 피어난 권사님으로 인해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크게 감격하며 하나님 은혜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저는 지금도 신앙촌에 올 때마다 건설대로 일하던 시절 다정한 음성으로 “제주에서 왔지?” 하시며 축복해 주시던 하나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한없이 베풀어주시며 감람나무 가지들이 구원 얻기를 바라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앞으로 저의 남은 시간들은 성결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라 하셨던 그 뜻을 따라 자유율법을 지키며 맑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