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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날씨에 이슬비같은 은혜가 쏟아져 내려

김정자 권사(2) / 소사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40

선교사인 교장선생님을 비롯해 모든 교사가 기독교인인 수피아여고에
제 앞으로 신앙신보가 배달되자 선생님들은 전도관에 가는것을 반대해

제가 다니던 광주 수피아여고는 선교사인 교장선생님(Florence E. Root)을 비롯해 모든 선생님들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신앙신보가 학교로 배달되면서 선생님들은 제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전도관은 이단이니 절대 가면 안 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교장선생님이 저를 부르셔서 “네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은 한때의 충동일 뿐이다. 그런 것은 시간이 지나면 곧 잊어진단다.”라고 하시기에 “선생님, 저는 일시적인 충동이 아닙니다. 거기서 분명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전도관에 다니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들의 반대 속에서도 저는 제단에 다니며 은혜를 받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광주전도관에서 안찰을 받은 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몸은 가볍고
발이 땅에 안 닿고 붕붕 떠서 오는듯 친구들은 저를 보고 부드러워졌다고

그로부터 얼마 후 하나님께서 광주전도관에 오셔서 예배를 인도하신 후 많은 교인들에게 안찰을 해 주셨습니다. 저도 그때 안찰을 받았는데, 심한 통증을 겨우 겨우 참으면서 ‘하나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몸이 너무나 가볍게 느껴져서 발이 땅에 닿는지 안 닿는지 모를 정도로 둥둥 떠서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안찰을 받은 후로 아무리 속상하고 언짢은 일이 생겨도 짜증이나 화가 나지 않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보면 성심껏 도와주어야만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친구들은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해 겨울방학이 되어 영산포 집에 갔을 때는 영산포제단에 오신 하나님께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줄을 서서 안찰을 받는 가운데, 제 차례가 되었을 때 “동상에 걸렸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심한 동상이 있어서 늦가을이면 손발이 발갛게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하고, 날씨가 약간 풀릴 때면 그 가려운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제 양손을 한참 동안 축복해 주셨는데, 놀랍게도 그때부터 손발의 동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약사이신 아버님이 갖은 약을 다 써도 낫지 않았던 동상이 안찰을 받은 후로 깨끗이 나아서, 언제 동상을 앓았던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 후로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재발한 적이 없습니다.

이만제단 개관집회 위해 상경한 서울역 대합실엔 전국에서 모인 교인과
안내하는 학생들, 찬송을 연주하는 밴드대로 잔칫날 같은 분위기
거리의 버스는 이만제단 포스터를 붙이고 달려 전도관 세상 같이 느껴져

이듬해인 1957년 4월에는 서울에 이만제단이 건설되어 개관집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전국의 교인들이 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하였고 저도 광주제단의 친구들과 함께 서울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서울역에 도착해 보니 이만제단 학생들이 출입문 앞에 서서 반갑게 교인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안내 띠를 두른 학생들은 시종일관 미소를 띠며 인사를 하였고, 관악기로 이루어진 밴드대가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하는 찬송을 힘차게 연주했습니다. 서울역 대합실은 전국에서 모인 교인 분들과 이만제단 학생들로 가득하여 마치 잔칫날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역에서 나와 보니 거리를 달리는 버스마다 “서울시민 심령대부흥회”라는 이만제단 집회 포스터가 붙어 있어서 ‘아! 여기는 전도관 세상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흘간의 집회 기간 중에 하루는 전국의 학생 천성회 임원들이 모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학생회 임원으로 모임에 참석했는데, 하나님께서는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권하시며 전도를 비롯한 앞으로의 계획을 자상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에게 사과를 나눠 주시며 따뜻하게 격려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르곤 합니다.

오매불망 바라던 소사신앙촌에 입주 하나님께 인사드리러 갔을 때
“낮아지고 낮아져서 똥통이라도 질 수 있는 심정이 되어야”라고 하셔

그해 11월부터는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손수 이루어 주신 신앙촌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간절해져서 신앙촌 입주를 오매불망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소사신앙촌에 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똥통을 지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당시는 재래식 화장실이 대부분이라 똥통을 지는 일이 흔한 때였지만 그런 일을 하라 하시니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958년 1월, 저는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관장님과 함께 하나님을 찾아뵈었을 때 관장님이 제가 입주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낮아지고 낮아져서 똥통이라도 질 심정이 되지 않고는 여기에 들어오기 힘들지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꿈에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고, 다시금 저의 마음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귀한 곳에서 시간을 헛되게 보내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시간을 아끼며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메리야스 공장에서 근무하게 된 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일하면서 진실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밖에 서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바깥을 향해 축복하시자
화창한 날씨에 이슬비처럼 은혜가 내리는데 옷은 젖지 않아

소사신앙촌에서는 노구산 정상에 오만제단을 건설했는데, 오만제단이 완공되기 전까지 임시로 작은 제단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제단에 자리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깥에 서서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느 일요일 낮 예배 때 저도 제단 바깥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찬송을 인도하시던 중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쉭! 쉭!” 하시며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그날은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지만 그때부터 머리 위로 빗방울이 쏟아지면서 촉촉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옷을 만져 봐도 전혀 젖어 있지 않은데 이슬방울이 계속해서 내리는 것을 보면서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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