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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은혜 주시고 구원의 길을 깨닫게 해주신 그 사랑

김종일 관장(2) / 구리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334

그리고 박 장로님께서 성경 호세아 14장을 풀어 주시며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시는 감람나무”를 설명하실 때는 참으로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저는 성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매일같이 성경을 읽었으나, 박 장로님께서 말씀하시는 성경 구절은 난생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에 감탄하며 ‘그동안 나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태선 장로님이 감람나무이심을 분명히 깨달으면서 ‘은혜를 주시는 이 길을 끝까지 따라야겠다.’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성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매일 성경을 읽었으나
박장로님께서 말씀하시는 성경구절은 난생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워
‘그동안 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구나’

그 후로 시간을 아껴서 소사신앙촌을 자주 방문했는데, 일요일에 소사신앙촌에 들어설 때면 오만제단의 아름다운 음악 종소리가 마음을 깊이 울리면서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박 장로님의 인도에 따라 힘차게 찬송을 부를 때면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기쁨을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었고 ‘어디 가서 이런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육이오전쟁을 겪고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우울하고 어두웠으나 은혜를 받고부터 제 마음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쁜 군 생활 중에도 즐겁고 활기차게 지내며 얼굴에서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았으며, 신앙촌에 가서 하나님을 뵙고 은혜 받는 시간을 늘 고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종종 부대의 선후배를 소사신앙촌에 데려가서 신앙촌을 소개하고 예배에 참석하게 했습니다. 특히 신앙촌 내의 ‘주인 없는 상점’을 보여 주면서 ‘신앙촌은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곳’이라고 설명하면 모두들 놀라워했습니다. 그렇게 신앙촌에 왔던 후배 중의 한 명은 이후에 계속 제단에 다니게 되었고 제대 후에는 전도관의 전도사로 발령받아 전도 활동을 했습니다.

신앙촌에 다니면서 전도사님들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저와 비슷한 연배의 젊은 전도사님들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모습을 볼 때면 ‘저분들은 참으로 복된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무척이나 부러웠습니다. 그러던 중 소사신앙촌에서 예비 전도사 교육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교육에 꼭 참가하고 싶었습니다. 군 생활 중이라 교육에 전부 참여할 수는 없었으나 틈틈이 시간을 내어 수업을 받으면서 교육 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1962년 12월 30일 제대하는 날 곧바로 협회에 가서 전도사 발령을 받고 강원도 황지전도관으로 부임했습니다. 황지는 저희 가족들이 포항에서 이사하여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청소년기에 6.25 전쟁을 겪으면서 마음이 우울하고 어두웠으나
은혜를 받고부터 마음이 달라져 바쁜 군대 생활중에도
즐겁고 활기차게 지낼 수 있게 되고 얼굴엔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게 돼

당시 황지에는 전도관이 없었으나 서울 이만제단에서 장로 임명을 받은 분을 비롯하여 대여섯 명 정도의 교인이 있었습니다. 저는 우선 저희 집 방 한 칸을 예배실로 꾸미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전도하여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몇 개월 후에는 부지를 마련해 제단 건물을 지었는데 제단이 완공된 후로 전도가 활발히 이뤄지면서 교인들이 7, 8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당시는 황지에 광산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라 전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후 1967년 서울 4중앙 산하의 대림동전도관으로 발령받았을 때 4중앙 산하의 20여 개 제단이 ‘4배가 운동’을 하기로 뜻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심방을 다니면서 이전에 제단에 나왔다가 쉬고 있는 분들과 제단에 다니지 않는 분들을 소개 받아 찾아갔습니다. 성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감람나무에 관한 구절을 중점적으로 설명했는데, 저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저는 목사가 될 생각으로 성경 고등학교에 다니며 공부했지만 성경에 기록된 감람나무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감람나무 박태선 장로님께서 내리시는 은혜를 직접 체험하고 그 말씀을 들으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심방을 통해 만난 분들이 점점 전도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귀한 은혜와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었으며 밤늦도록 심방을 해도 피곤한 줄을 몰랐습니다.

간암으로 운명하신 주일학생 아버지
그 모습에 자녀들도 무서워 울었는데
생명물로 씻기자 섬뜩한 모습 사라져
아이들도 울음 그치고 웃는 얼굴 보여

그 후 1994년 수원교회에서 시무할 때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전에 시무했던 충남 홍성제단의 주일학생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저는 홍성제단 관장님과 함께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고인은 비록 제단에 나오지 않았으나 그 집의 어머니와 아이들이 제단에 다니는 것에 호의적인 분이었습니다. 간암으로 돌아가신 고인은 배에 복수(腹水)가 가득 차서 임산부처럼 부풀어 있었으며, 피부가 검은빛을 띠고 머리카락까지 산발이 되어 보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네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그 집의 어린 남매들은 아버지를 보고 무서워하며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달래며 울지 말라고 한 후 저와 홍성제단 관장님, 교인들이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가량 힘차게 찬송을 부르고 나자 검은빛을 띠던 시신의 피부색이 놀랍게도 뽀얗게 피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물로 시신을 닦은 후에는 임산부처럼 부풀었던 배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다 가라앉았으며, 머리까지 감겨 드리고 나니 섬뜩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참으로 깨끗하고 편안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둔 후 무서워하며 울던 아이들은 예쁘게 핀 모습을 보고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천진난만하게 웃기도 했습니다. 섬뜩했던 시신이 그처럼 아름답게 피어나고 가정의 분위기가 편안하고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저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마음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수원제단에서 시무하며 심방을 다니던 중에 오랫동안 제단을 쉬었던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제단에 나오면서 기장신앙촌의 축복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신앙촌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하는 찬송을 부를 때 그분이 목이 메어 부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젊은 시절에 밴드대를 했던 그분이 제단의 중고등 학생들에게 관악기를 가르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셔서 그때부터 학생들에게 관악기를 가르치며 밴드대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제단에 모여서 즐겁게 연습하던 학생들이 지금 청년으로 장성하여 기장신앙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가끔씩 연주하는 모습을 볼 때면 참으로 대견하고 청년들이 귀한 길을 힘차게 걸어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지나온 시간을 글로 정리해 보니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표현하기에는 어떤 언설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찬송을 부를 때 가슴 가득히 차오르던 기쁨과 안찰을 받은 후 온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상쾌했던 체험은 세상의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늘의 은혜를 내려 주시고 구원의 길을 깨닫게 해 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저 천국 들어가는 날 주 앞에 가리라.” 하는 찬송가와 같이 하루하루 열심히 전도하며 맑고 성결하게 살아서 그날에 하나님을 뵈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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