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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은혜가 내 몸과 마음에 스며든다는 것이 신기해

김주자(1)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06

이만제단 모습(1957년)

저는 1937년 전라남도 목포시 창평동에서 태어났습니다. 4남매 저희 형제들은 부모님을 따라 어릴 적부터 성결교회에 다녔고, 아버지가 인쇄소를 하셔서 큰 부자는 아니어도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 제가 자랄 때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이 많았는데 베풀기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거지 아이를 만나면 집에 데려와 씻기고 먹인 후 고아원까지 업어다 주셨습니다. 열성 성결교인이셨던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신기한 일을 겪었다고 하셨습니다.

전쟁 통에 아버지가 시골로 피난했을 때 공산당이 온 동네를 뒤져 교회 다니는 남자들을 끌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남자들을 때리고 죽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아 아버지는 다락에 숨어 지냈는데, 어느 날 밤에 “상용아, 상용아! 어서 자리를 피하라!” 하고 아버지를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고 하셨습니다. 순간 공산당인 줄 알고 기절할 듯 놀랐지만 막상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고, 그 동네에 아버지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어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자리를 피하라는 그 음성을 듣고 보니 왠지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다락에서 나와 집 옆 과수원에 숨었는데, 곧바로 공산당이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붙잡혔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며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어릴 적부터 성결교회에 다닌 저는 철이 들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하게 예배드리고 싶었는데 제 또래 젊은이들이 예배 시간에 장난치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졌습니다. ‘이렇게 믿어서 천국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온 가족이 다니는 교회라 빠지지 않고 나갔습니다.

목포 전도관 부흥집회에 어머니와 참석
고급 향수처럼 좋은 향기가 진하게 맡아져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는 것을 알게 돼
향취를 맡으니 왠지 모르게 기쁘고 즐거워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외출했다가 YMCA 회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건물 밖까지 발 디딜 틈 없는 모습을 봤습니다. 서울에서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오셔서 부흥집회를 하신다고 했습니다. 호기심에 친구들과 구경하다가 북소리에 맞춰 힘차게 손뼉 치며 찬송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낮에는 집회하시고 저녁에는 안찰을 해 주셨는데 안찰 받고 많은 환자들의 병이 나았다는 소문도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 후 1957년 2월 박 장로님께서 목포에 ‘전도관’을 세우시고 개관 기념 부흥집회를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참석했습니다. 저녁 집회 때 찾아간 전도관은 대낮처럼 밝았습니다. 형광등을 환하게 밝힌 예배실은 사람들의 우렁찬 찬송 소리로 들썩들썩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신나게 찬송하는 사람들 속에서 저도 손뼉 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느릿느릿 찬송하는 성결교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고 찬송이 이렇게 신나고 재미있구나 싶었습니다.

한참 찬송할 때 어디서 나는지 고급 향수처럼 좋은 향기가 진하게 맡아졌습니다. 옆에 계신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더니 “나는 꽃밭에 온 거 같구나. 어디서 이렇게 장미 향기가 나니?”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주변의 전도관 교인들에게 웬 향기가 자꾸 나냐고 물어보시자 교인들은 웃으며 “처음 오셨어요? 은혜 받으셨네요.” 했습니다. 그 향기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향취 은혜라며 전도관에 나오면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수십 년 성결교회에 다녔어도 그런 은혜는 처음 듣는다며 신기한 일도 다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향기를 맡은 후로 왠지 모르게 기쁘고 즐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찬송을 부르는 것이 너무 좋아서 매일 저녁마다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일주일간의 집회가 끝난 후 어머니는 성결교회에 가지 않으시고 목포전도관으로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10리 길을 걸어 예배를 드리러 다니셨습니다.

갖은 약을 써도 낫지 않던 남동생 종기에
생명물을 묻힌 탈지면을 붙이니
심하게 헐았던 상처가 진물이 멎고
불과 며칠만에 씻은 듯이 깨끗이 나아

그 즈음 아버지는 하시던 인쇄소를 접고 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가셨습니다. 부모님은 차차 서울로 이사할 계획을 세웠는데 외동아들인 남동생이 먼저 서울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게 됐습니다. 그런데 몇 달도 되지 않아 아버지와 남동생이 목포로 내려왔습니다. 남동생이 발제(髮際)라고 하는 종기가 나서 갖은 약을 써도 낫지 않는다 했습니다. 목 뒤 머리털이 자라는 경계에 생기는 발제는 다른 종기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좋은 약이 많아서 종기가 대수롭지 않은 병이지만 그때는 종기를 다스리지 못해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남동생을 보니 목 뒤 에 종기가 여러 개 나서 곪아 터져 있었고 진물이 줄줄 흐르는 것이 얼마나 아플까 싶었습니다. 말수가 적은 동생은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통증 때문에 밥도 못 먹고 몸져누워 버렸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학교도 못 가고 앓아누워 있으니 부모님은 크게 걱정하셨습니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목포전도관에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생명물을 받아오셨습니다. 생명물은 박 장로님께서 축복하셔서 성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생명물로 병이 낫기도 하고 여러 가지 기사이적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식구들이 모여 앉아 간절히 기도드리는 동안 어머니는 생명물을 탈지면에 묻혀 종기가 난 곳마다 붙여 주셨습니다. 그러고 나니 동생은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가 식구들을 부르셔서 가 보니 동생 목에 붙인 탈지면을 떼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탈지면을 바꿔 주려다가 깜짝 놀랐다 하셨습니다. 심하게 헐어 있던 상처가 어느새 진물이 멎고 꾸덕꾸덕 말라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룻밤 새에 이렇게 좋아질 수 있는지 놀라웠습니다. 그 뒤로도 생명물을 계속 발라 주시자 눈에 띄게 상처가 아물더니 불과 며칠 만에 깨끗이 나았고, 동생은 언제 아팠던가 싶게 밥도 잘 먹고 건강해졌습니다. 아무리 약을 쓰고 병원에 다녀도 낫지 않았는데 생명물로 씻은 듯이 낫게 되니 참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그때부터 전도관에 다녀 보고 싶었던 저는 서울로 이사하면서 마포 이만제단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만제단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실 안에 보슬보슬 이슬비가 내려
비를 맞아도 옷이 하나도 젖지 않고 온몸이 시원하고 상쾌해짐을 느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속 죄악을 씻어 주는 성신의 단비임을 깨닫게 돼

하루는 여동생과 함께 이만제단에서 예배드릴 때였습니다. 예배실 안에 보슬보슬 이슬비가 내려 온몸이 시원하고 상쾌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예배실 안에 비가 오나 하며 옷을 만져 봤지만 보송보송할 뿐 전혀 젖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옆에 앉은 동생이 “언니, 예배실에 비가 내려.” 하며 연신 천정을 올려다보기에 옷을 한번 만져 보라 했습니다. 동생은 옷이 하나도 안 젖는데 계속 비가 오고 몸도 시원해진다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날 설교 시간에 박 장로님께서는 ‘성신의 단비’를 말씀하셨습니다. 성신이 이슬비처럼 내리는 것을 직접 보고 체험한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시자 이만제단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신을 받으면 시원함을 느끼게 되고 마음속의 죄악이 씻어진다 하셨습니다. 동생과 저는 서로 쳐다보며 “그 비가 성신의 단비구나!” 하고 신나서 이야기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뒤로 몸은 날아갈 듯 가볍고 마음이 참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하나님 주시는 은혜가 내 몸과 마음에 스며든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김주자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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