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작아도 하나님 일을 하면 축복과 은혜를 주심
최온순 승사(2) / 기장신앙촌<이어서>대구 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이후 저는 박 장로님을 따르는 것이 참길이며 바르게 믿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늘의 은혜를 받았던 그 체험은 장로교회에 다니는 동안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은 어떤 추상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었을 때 받게 되는 확실한 체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구원을 얻는 것도 죄를 씻어 완전한 자격을 갖추어야 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30년 가까이 믿어온 신앙이 그저 형식뿐이었음을 깊이 깨달은 저는,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한 구원의 길을 따르게 된 것이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남편은 부산 초량에서 열린 집회부터 하나님을 따라다니게 되었고, 그 후 1956년 1월 저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해부터 용산구 청암동에 이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만제단을 짓게 되었는데, 남편이 건설 현장의 책임을 맡게 되어 저희 가족은 이만제단 터에 집을 마련해 살았습니다.
이만제단이 지어지는 현장에서 건설 과정을 지켜보았던 저는 그때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때는 현대적인 건설 장비가 흔하지 않을 때라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음에도 힘들거나 피곤한 줄을 몰랐습니다. 돌을 줍는 할머니부터 모래를 나르는 젊은이까지 다들 즐거운 얼굴로 찬송을 부르며 일했습니다. 저도 자갈을 통에 가득 담아 운반하곤 했는데, 누가 뒤에서 받쳐 주는 것처럼 발걸음이 사뿐사뿐하며 너무나 가벼웠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국으로 순회 집회를 다니시느라 바쁘신 중에도 틈틈이 이만제단 건설 현장에 오셔서 진행 과정을 살피셨고, 사람들에게 안수를 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뿐 아니라 철모르고 뛰어노는 어린아이들도 하나도 빼놓지 않으시고 안수해 주셨는데, 그 존안은 너무도 인자한 모습이셨습니다. 작업 도중 다친 사람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물로 깨끗이 나았던 일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해 10월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가 열렸을 때는 한창 건설이 바쁠 때였는데, 어떤 사람들은 체육대회보다 일하는 게 더 즐겁다며 현장에 나와 일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을 더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은혜 속에 기쁘고 즐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만제단을 건설할 당시 저희 집에 생명물을 축복하시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드럼통같이 큰 통 여러 개에 물을 가득 담아 놓으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 주셨고, 사람들은 저마다 병을 가져와 생명물을 받아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생명물 통의 뚜껑을 열었는데, 아주 뽀얀 안개 같은 것이 물 위에 가득히 내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생명물에는 이슬성신이 담겨 있음을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면서 소중하고 귀한 가치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생명물을 마시거나 병에 담을 때면 한 방울도 헛되이 흘리지 않으려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건설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957년 4월, 이만제단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수려한 경관 속에 지어진 이만제단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일요일이면 1층은 물론이고 2층, 3층까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예배를 드렸고, 그 속에서 국방부 장관 부인이었던 홍은혜 여사나 임영신 중앙대 총장 같은 분들이 간절히 기도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만제단 가는 길은 오르막이었는데, 노인 분이나 아기를 업은 여자 분이 그 길을 오를 때면 학생들이 등을 밀면서 도와 드렸습니다. 교인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주던 그 모습은 볼 때마다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이듬해인 1957년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남편이 건설 현장의 책임을 맡아 먼저 신앙촌에 들어갔고, 저는 아이들과 함께 그해 12월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우물 공사를 할 때였는데, 그때 오만제단에서 새벽예배를 마치면 돌 하나씩을 들고 공사하는 곳까지 가져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다리셨다가 일일이 사람들 머리에 손을 얹으며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무거워 보이는 돌을 골라 머리에 이고 내려가면 안수받을 때의 기쁨이 떠오르면서 어느새 훌훌 날아가는 듯 무게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돌 하나 나른 것도 그냥 나른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 일을 하면 축복으로 연결해 주시며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날이 갈수록 소사신앙촌은 아름다운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 갔습니다.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와 당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었던 현대식 주택, 그리고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힘차게 돌아가는 각 공장에서는 품질 좋은 제품을 다양하게 생산했습니다. 또 무인상점에서는 돈을 받는 사람이 따로 없이 각자 필요한 물건을 가져가고 값을 치렀는데, 판매된 물건과 들어온 돈이 정확히 맞았을 만큼 모두들 맑고 바르게 살았습니다.
신앙촌에서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이 되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기성교계와 정치권이 결탁해 말도 되지 않는 죄목으로 하나님을 구속시킨 것이었습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야 말할 수 없었지만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