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신앙의 울타리, 소사신앙촌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어나듯
인중애 권사(2)/기장신앙촌1957년 11월이 될 무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기도 부천에 신앙촌을 건설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신앙촌은 자유율법을 지키는 곳이 될 것이며, 앞으로 첫째 울타리와 둘째 울타리를 거쳐 셋째 울타리까지 건설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사신앙촌이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건설대원 작업복 제작, 양재 기술자 모집’이라는 광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소사신앙촌에서 건설대로 일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기회가 오지 않아 속상했는데 비록 건설대원은 되지 못했지만, 소사신앙촌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 양재 기술자 모집에 자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 후 양재학원에서 1년 넘게 교육을 받았던 터라 얼마 후 양재 기술자로 선발되어 1957년 11월 10일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각지에서 모인 젊은이들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건설대원들이 입을 옷을 제작했습니다. 그것은 짙은 초록색의 멜빵바지와 아이보리색의 남방 상의로 ‘시온복’이라고 불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새 형식의 작업복으로 남녀노소 구별 없이 활동하기 편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저는 재봉틀로 멜빵바지를 만드는 팀에서 일했는데, 3~4일쯤 지났을 무렵 놀랍게도 건설대원을 추가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신 것 같아 속으로 기뻐 뛰며 바로 건설대에 자원을 했습니다.
제 나이 21살, 드디어 350여 명의 1차 건설대원들 사이에서 저도 시온복을 입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메마른 땅 위에 세워진 소사신앙촌
처음 도착한 소사신앙촌의 모습은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황폐하고 메마른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뱀은 왜 이리 많은지 발조차 디딜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작업 현장에 오셔서 땅을 향해 ‘쉭’ 하고 축복해 주시면 수많은 뱀이 똬리를 틀며 죽어나갔고 우리는 그것을 모아 가마에 넣어 태운 후 일을 시작했습니다.
넓은 대지에 제일 먼저 빨간 벽돌로 1동 건물을 올리는 작업을 했습니다. 빨간 벽돌은 밖에서 사왔었는데 30가구 정도 완료하고 2동부터는 저희가 손으로 직접 찍어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저희 팀은 여자 11명이 한 팀이 되어 일했는데 저는 인천 반사 시절 우리 반 학생이었던 동생(정인선, 現 기장신앙촌)과 함께 벽돌을 찍어냈습니다. 벽돌을 계속 만들다 보면 힘들기 마련인데 오히려 몸이 가벼워져 붕붕 뜨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면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저 멀리서 오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더 신이 나서 동생과 함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착착 맞춰 일하니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모릅니다. 당시 소사신앙촌을 견학하러 온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놀라서 구경했다고 동료들이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적극적 자세로 일할 때 기뻐하심을 깨달아
3동 건물을 지을 때였습니다. 계수리에 사람 키를 넘을 정도로 큰 시멘트 반죽 기계가 들어왔는데 기계에 흙과 돌가루를 넣으면 반죽이 만들어졌습니다. 재료들을 섞기 위해 기계에 달린 손잡이를 재빠르게 눌러 휙휙 돌려야 하는데 아주 힘이 세어야 손잡이를 돌릴 수 있었고 기운이 세지 못한 사람은 손잡이를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기계를 돌려 시멘트 반죽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일도 하려고 하는 마음을 먹으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힘을 주셔서 결국에는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알기에 있는 힘껏 기계를 돌려 벽돌을 찍어 내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적극적으로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찍은 벽돌을 운반부에서 옮겨 주었는데 한 개의 무게가 대단해서 한 사람이 2~3개 정도밖에 들지 못했습니다. 말린 벽돌을 계수리 포도밭 숙소 짓는 곳으로 운반해서 가면 어느새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한 명 한 명 안수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건설이 이루어지는 곳곳을 수시로 돌아보시며 안수 안찰해 주셨기에 일하는 중에도 향취가 진동했습니다.
한마음으로 나아갈 때 은혜 주셔
신앙촌 사람들은 모두 ‘힘든 일은 내가 먼저’라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배려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일했습니다. 그렇기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인의 일을 마치고 스스로 일을 찾아서 건설 작업을 돕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소사신앙촌은 건설대원은 물론 사무실과 공장 직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신앙촌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만들어 갔습니다.
전국에서 건설대 지원자들이 몰려와서 건설대원 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나중에는 출신 지역별로 반을 만들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시멘트 반만 인천, 전주, 광주팀 등 14개의 지역으로 팀을 나누어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목표를 세우고 지역별로 대결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달려갈 목표가 생기니 우리 팀이 1등을 하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원래 하던 정도로는 1등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우리 인천팀은 남들이 잘 때 먼저 일어나 횃불을 켜 놓고 일을 했습니다.
있는 힘껏 일하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께서 오셔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일할수록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났습니다.
결국 우리 팀이 1등으로 목표를 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겼다’ 하시며 기뻐해 주셨고 저희 11명 모두에게 특별안찰을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밤낮으로 건설대원들과 함께 일하시고 축복까지 해주시느라 쉴 시간도 없으셨는데 특별안찰을 해 주신다고 하니 감사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모두 줄을 서서 기다려 안찰을 받고 나니 몸이 붕붕 뜨는 것같이 가벼워졌고 기쁨이 샘솟는 것은 말로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은혜 안에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주시는 은혜의 기쁨은 건설대로 일하는 내내 큰 교훈이 되어주었습니다.
노구산 집회(1958. 6. 30.~7. 5.)
추운 겨우내 주택 공사가 진행되었고 봄이 찾아올 무렵에는 벽돌 찍던 자리에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 건물을 3층까지 올려 준공했습니다.
각종 공장과 주택 건설이 계속 이어지던 가운데 1958년 여름 노구산 집회가 열렸습니다. 연 70만 명이라는 수가 온 산을 뒤덮어 절정을 이루었던 노구산 집회 때 소사신앙촌 식구들은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안내하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저는 늦은 시간까지 집회장을 떠나지 않은 참석자들이 소사신앙촌 안에 있는 학교에서 주무실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일을 했습니다. 비가 오는 속에서도 이어진 노구산 집회는 마음의 기쁨과 향취 은혜로 가득했던 놀라운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물을 축복하셔서 그 많은 집회 참석자들이 모두 마실 수 있도록 나눠주셨습니다.
건설대를 지휘, 축복해주신 하나님
한번은 하나님께서 식수를 공급할 우물을 파자고 하셨습니다. 소사신앙촌 입주민들을 위해 커다란 우물 5개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건설대원들은 금세 우물을 파 내려갔는데 그 깊이가 사람 키를 넘어설 정도로 깊어지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우물 안으로 들어가셔서 작업을 진두지휘하셨습니다. 30여 명의 건설대원들도 우물 안에 들어가 나무 비계로 계단을 만들어 흙을 밖으로 퍼 날랐습니다.
그다음에는 우물 벽을 단단하게 지지하기 위해 큰 돌이 필요했습니다. 노구산 꼭대기 오만제단 터를 닦으며 깨 놓은 커다란 돌을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신앙촌 사람들이 새벽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돌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와서 우물 쌓는 곳에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는 어느새 오셔서 안수를 해주셨습니다. 차츰 계획했던 우물을 모두 만들어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신앙의 울타리, 소사신앙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아름답게 피어나듯 건설되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