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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죄 타는 냄새에 이어 기막힌 성신의 향취 맡아

서영자 권사(1) / 덕소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268

저는 1932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장로교회에 다녔던 저는 임실군의 독실한 장로교 집안에 시집간 후로 더욱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오수 장로교회의 장로이신 시아버님(故 김재선 장로)은 신앙생활에 정성을 기울이며 어려운 사람을 한식구처럼 보살피는 분이었습니다. 가을이면 수확한 곡식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 주셨으며 육이오 전쟁 때는 피난민들을 집에서 먹이고 재우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던 1954년경 저희 가족이 시댁에서 분가해 전주에서 살던 때였습니다. 나운몽 장로의 부흥집회가 전주에서 열려 시부모님과 함께 참석했는데, 저는 거기서 처음으로 방언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방언을 받은 사람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말을 빠르게 중얼거렸으며, 자리에 쓰러져서 눈을 하얗게 뒤집은 채로 사지를 부들부들 떨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한참 후에 깨어나서도 눈빛이 멍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방언하는 것이 은혜를 받은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모습이 너무도 소름 끼치고 무섭게 느껴져서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회에 같이 간 오수 장로교회의 교인들 모두 방언을 받았는데, 저와 시부모님은 한마디도 방언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한번은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의 부흥집회가 순천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시아버님 혼자 다녀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시아버님은 그 집회에서 굉장한 은혜가 내렸다면서, 좋은 향기가 진동하고 가슴 속이 시원하여 엿새 동안 밥을 먹지 않았는데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거기에 가족들을 안 데려간 것을 몹시 아쉬워하시면서 “얼마 후에 박 장로님께서 전주에서 집회를 하신다고 하니 그때 꼭 참석하자.” 하셨습니다. 그 후 1956년 3월에 전주 시내 곳곳마다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의 부흥집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은 것을 보고, 저는 ‘드디어 그분이 오시는구나!’ 하며 집회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천막집회 예배에서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솟아나는데
한순간도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아 집회가 열리는 엿새 동안
꼬박 철야를 하고 밥을 먹지 않는데도 배고픈 느낌이 전혀없어

집회 첫날 저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집회가 열리는 전매청 광장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엄청난 천막이 쳐져 있었는데, 저는 부흥집회에 많이 다녔지만 그처럼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린 것은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서 다른 사람의 무릎 위에 앉다시피 할 정도였으며, 천막 가장자리에는 들것에 실려 온 중환자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시아버님이 앞자리에 앉는 것이 좋다고 하시며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셔서 저희 가족은 앞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 박태선 장로님께서 등단하시자 소란스럽던 장내가 일순 조용해졌습니다. 곧이어 예배가 시작되어 찬송을 부르던 어느 순간, 코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악취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난생처음 맡아 보는 지독한 냄새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이게 도대체 어디서 나는 냄새지?’ 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처럼 고약한 냄새가 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 박 장로님께서 청중들을 향해 “쉭! 쉭!” 하시는 순간, 그토록 지독하게 풍기던 악취가 거짓말처럼 사라지더니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향기가 배 속까지 깊이 스며들어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제 옆에 앉은 분들도 “어머! 향기가 나요.” “좋은 냄새가 나네.” 하며 서로들 이야기했는데, 그때 박 장로님께서 “지금 향기를 맡은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하셨습니다.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자 박 장로님께서는 그것이 성신을 받은 거라고 하셨습니다.

찬송을 마친 후 박 장로님께서는 단상에서 내려오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에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저는 안수를 받는 순간 불덩어리가 속에 들어온 것처럼 몹시 뜨거워지더니, 차차 뜨거운 기가 사라지면서 온몸이 아주 시원해졌습니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가볍게 느껴지며 마음이 그렇게 잔잔하고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다시 단상에 오르셔서 병이 나은 사람은 일어나 보라고 하시자,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어디가 나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중에 벙어리였던 10대 소년이 말문이 트였다고 외치자 박 장로님께서는 단상으로 올라오라 하셨습니다. 소년은 박 장로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엄-마, 아-빠” 하며 더듬더듬 말을 하였고, 단상 아래에 있던 소년의 부모님이 훌훌 뛰며 기뻐하는 것을 어떻게 다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다 함께 손뼉을 치며 환호하는 모습은 더할 수 없이 기쁜 잔치가 열린 것 같았습니다.

집회가 열리는 엿새 동안 저희 가족은 집회장에서 꼬박 철야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가득 찬 그곳에서 자리를 뜨면 금세 앉을 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잠시도 비울 수가 없었고, 예배를 드리는 동안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솟아나서 한순간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같이 찬송을 밤새워 부르다 보면 시간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으며,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하는 찬송을 목청껏 부를 때, 기쁨에 가득 찬 사람들의 얼굴은 달덩이처럼 환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 후 집회가 끝나는 날 박 장로님께서 광고하시기를 “오수에서 오신 김재선 장로님은 내가 묵는 숙소로 잠깐 오세요.”라고 하셨습니다. 시아버님은 “박 장로님께서 나를 어찌 아실까?” 하며 깜짝 놀라셨고, 저와 시어머님도 “여기서 우리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 하며 어리둥절했습니다. 시아버님은 숙소에 가셨다가 너무도 환한 얼굴로 돌아오시더니 “박 장로님께서 집회를 마치고 가시는 길에 우리 집에 들르신다고 하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늘 장로님 댁에 가서 예배 볼 장소를 정해 드리려고 그래요.”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아버님은 빨리 가서 준비를 해야겠다며 서둘러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얼마 후 시어머님께 말씀을 들어 보니, 박 장로님께서 수행원들과 함께 오셔서 집 안 곳곳에 축복을 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시댁 마당에는 예전에 명주 공장으로 사용했던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박 장로님께서 그 건물에 한참 동안 축복해 주시며 “여기서 예배를 보시지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시아버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축복해 주셨던 그 일은 저희 가족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아버님은 명주 공장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셨는데, 그 후 정식으로 오수전도관이 세워지기 전까지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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