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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말씀을 듣다

강문형 권사(2) / 인천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225

강문형 권사 / 인천교회

어머니와 저희 형제들은 전도관에 다니면서부터 오랫동안 다녔던 충무 장로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회 사람들이 종종 집에 찾아와서는 교회로 돌아오라며 어머니를 설득하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따금씩 “오늘도 장로교회 사람들이 다녀갔단다.” 하는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는 계속 전도관에 다닐 텐데 그분들이 괜한 수고를 하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원효로 구제단과 가까운 집을 구해서 가족들 모두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단에 계속 다니면서 저는 어머니가 말씀해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조금씩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박 장로님께서 설교하시며 단상을 탁 하고 내려치시면 거기서 불이 번쩍번쩍 하고 팍팍 튀기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불성신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배를 드리다 보면 어느 순간 화장품이나 향수 냄새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향기가 맡아지는 때도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향수라도 계속해서 맡으면 질리게 마련일 텐데, 향취 은혜는 들이마시면 마실수록 속이 상쾌하고 시원해지며 입가에는 찬송이 쉼 없이 흘러나와 며칠씩 계속해서 찬송을 부르곤 했습니다. 제단에서 예배만 드리고 오면 괜히 기쁘고 좋아서, 누가 저에게 화를 내거나 언짢은 일이 생겨도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전혀 없이 편안하고 즐겁기만 했습니다.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의 설교 말씀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면서, 저는 그 말씀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성경 구절을 말씀하시는데, 이전에 장로교회에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하나님께서 ‘감람나무’에 대한 성경 구절을 말씀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이 임하리니 그 은혜를 내리는 자 감람나무와 같고 ~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호세아 14장 5절~6절)’ 하는 구절을 풀어 주시면서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고 향기를 내리는 자는 감람나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통하여 이슬 같은 은혜가 내리고 향기가 내려진다는 것은 온 세상이 부인하지 못할 사실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래, 나도 향기를 여러 번 맡았지! 그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감람나무이구나!’ 하며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하나님께서 성경 구절을 뽑아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는 말씀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와 박히면서, 어렵게 느껴졌던 말씀도 점점 이해가 되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이던 1956년 여름부터는 용산구 청암동에 이만제단(서울중앙전도관)을 건설하는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원효로 구제단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가 없어서 이만 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큰 규모의 제단을 짓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교인들이 스스로 나서서 공사를 돕는 분위기 속에서, 저도 건설 현장에서 돌을 나르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렬로 죽 서서 재빠르게 돌을 운반할 때면 힘드는 줄도 모르고 참 재미있게 일했습니다. 그때 저는 한창 친구들과 어울릴 나이였지만 제단을 짓는 현장에 있는 것이 훨씬 신나고 즐거워서, 아침 등굣길에서부터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곤 했습니다.

1957년 4월 드디어 이만제단이 그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완공된 이만제단에서 열흘 동안 낙성집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교인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셨습니다. 그분들을 학생들이 기차역에서부터 안내해 드리자는 의견이 있어서 집회 전날에 학생들이 용산역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학생회 봉사부로 활동했던 저는 학교를 마친 후 용산역에 갔더니 역 주변은 전국에서 오신 교인들과 그분들을 안내하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이만제단까지 안내를 하면서 거동이 불편하신 노인 분들과 환자 분들을 부축하거나 등에 업어서 모셔다 드렸습니다. 그날 저는 허리가 많이 굽으신 백발의 할머니를 업고 가면서, 어디서 그렇게 힘이 나는지 먼 거리를 쉬지도 않고 가볍게 걸어갔습니다. 그렇게 용산역에서 이만제단까지 몇 번을 왕복해도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저녁 늦게 도착하시는 교인 분들까지 모두 안내해 드린 후 이만제단에 모였을 때, 하나님께서 안내부 학생들을 전부 오라 하시며 안찰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저는 안내부가 아닌 봉사부였기에 안찰받는 자리에서 그만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속상하고 애타는 마음에 집에도 가지 않고 제단에 남아 있었는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학생회 부회장 언니가 뛰어와서는 “문형아! 영모님이 안찰해 주신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내부 학생들을 다 안찰하신 후 “세 명만 더 안찰하겠다.”라고 하셔서 부회장 언니가 제단 안을 둘러봤더니 저를 포함해 안찰을 못 받은 학생들이 딱 세 명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안찰을 받고 날아갈 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오면서 ‘영모님이 우리 마음을 아셨다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낙성집회 기간 중에 4월 30일은 제1회 장로 장립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이만제단으로 향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 예배실에 들어섰을 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어서 ‘어머나! 이게 뭐지?’ 하며 깜짝 놀랐습니다. 제 눈이 어떻게 된 줄 알고 얼른 두 눈을 비비고 깜빡여 보았지만 온통 뿌옇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밖을 내다보니 쨍쨍 햇볕이고 파란 하늘인데 예배실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뽀얀 구름에 완전히 덮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안개가 조금씩 걷히면서 사람들의 형상이 보이는데, 제 주위에는 고름투성이의 환자들이 누워 있었지만 나쁜 냄새는 하나도 나지 않았고, 오히려 상쾌한 바람이 삭삭 스치고 지나가면서 박하사탕을 먹은 것처럼 시원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맡아졌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150명이 넘는 어른 분들을 장로로 임명하신 후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를 짚으시며 안수해 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 당시 서울대와 중앙대 교수님, 수도공고 교장 선생님 등 이만제단에 열심히 나오시던 분들이 장로로 임명되셨습니다. 특히 그날 촬영한 사진에는 이슬성신이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모습이 생생하게 찍혀 있어서,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저는 온 제단에 이슬성신이 뽀얗게 덮여 있던 그때의 광경이 또렷이 떠오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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