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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성신을 주시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권능

이명호 권사(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38

어느 여름날 폭염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평일 오후 제단에 갔더니 전도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제단 근처에서 혼자 사시는 할머니 권사님이 돌아가셨는데, 너희 학생 세 명이 먼저 가서 찬송을 부르고 오라.” 하셨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이런 일이 처음이라 무섭기도 하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그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방문을 여는 순간 아주 진한 향취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확 불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강한 바람에 저희 모두 깜짝 놀라서 순간 멈칫했습니다. 놀라움으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들어가 보니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바람이 온 방 안에 휘돌며 향취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며 감격한 저희들은 다 같이 소리 높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참으로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권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별전도대를 조직하여 노방전도하고 구역예배 드리며
감람나무를 소리높여 증거해

당시 숭의동제단에서는 학생회의 전도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서울 이만제단에서 활동했던 특별전도대(특전대)처럼 인천에서도 학생들이 밴드대와 더불어 노방 전도를 하고 구역예배를 다니곤 했습니다. 토요일이면 밴드대를 앞세우고 노방 전도를 하면서 일요일에 하나님께서 인천제단에 오신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교인 집에서 구역예배를 드릴 때는 동네의 기성교인들도 참석하도록 권유하여, 성경 호세아서 등 감람나무에 대한 구절을 중점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분들에게 “성신을 받아 죄를 씻어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면 “그럼 학생들은 성신을 받았는가?” 하고 물어보는 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희들은 “예, 감람나무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게 시내 곳곳을 다니며 전도를 하고 제단으로 돌아올 때면 마음이 마치 화창한 봄 날씨처럼 밝고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다니던 송도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 30명 정도가 전도관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학교가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에 교목(校牧)이 있었는데, 한번은 교목이 전도관에 다니는 학생들을 불러서 전도관은 이단이니 가지 말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런 이야기에 저희들은 감람나무와 이슬은혜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목사님도 구원을 얻으려면 감람나무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목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떠나더니 이후부터 저희를 피해 다니며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저희들은 변함없이 방과 후에 제단으로 달려가 전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입대 후 군생활을 하면서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지지 않고
20리밖 용문전도관에 나가 예배드려

그 후 195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얼마 후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경기도 양평 용문산 부근에 위치한 부대에서 근무하면서, 약 20리 떨어진 용문전도관에서 수요일과 일요일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몹시 추운 날이나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에도 수요일과 일요일에는 어김없이 제단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중대장이 “전도관 교인들은 진실하게 믿으려는 것 같다.” 하며 이해해 주어서, 군 생활 3년 동안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사람이 지나기에도 약한 다리 위를 트럭을 몰고 건넜는데
이를 본 고참들이 `너는 하나님이 보호하셨다`며 놀라워 해
한동안 ‘부대의 화제’가 되고 나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감사

그러던 어느 날, 저는 고참병들과 함께 원주에서 차량에 기와를 싣고 양평까지 오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5톤짜리 군용 트럭 4대가 함께 이동하는데 제가 운전이 미숙하여 자꾸 뒤처지게 되자, 고참병들이 저를 보고 앞장서서 가라고 했습니다. 초행이라 길도 제대로 몰랐지만 어쩔 수 없이 앞장서게 되었고, 뒤에서는 계속해서 속도를 올리라고 빵빵 대며 뒤좇아 왔습니다. 저녁 무렵 어느 개천 위에 설치된 다리에 이르렀을 때, 저는 다리 앞쪽에 있는 자갈 더미를 보고 속도를 늦추려 했으나 뒤에서 더욱 요란하게 빵빵대며 속력을 내라고 독촉하였습니다. 당황한 저는 그대로 속력을 내어 자갈 더미를 밀어 버리고 다리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우당탕거리며 돌무더기를 통과한 후 다리를 건널 때까지 저는 눈을 감고서 핸들만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다리를 건넌 후 차를 세워 놓고 뒤의 차량들을 기다리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은 다리를 건너지 않고 다리 밑 개천의 물살이 약한 곳을 따라서 건너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고참병들이 차에서 내려 저에게 다가오더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하며 놀라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제가 어리둥절하여 그들을 바라보자 “너 전도관 다닌다고 했지, 너는 하나님이 보호하셨다. 어떻게 저 다리를 건널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다리는 부분적으로 공사를 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보수를 위해 기존의 상판을 뜯어내는 중이라 일부분이 철제 아나방(あなばん, 유공발판)과 합판으로 얼기설기 이어져 있어서, 5톤 트럭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이 지나가기도 어려운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참병들이 경적을 울리며 가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는데, 저는 그것을 빨리 가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속력을 더 내 버렸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습니다. 다리를 쳐다보니 정신이 아찔할 뿐이었습니다.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 그 일은 부대 내에서 큰 화제가 되었으며, 저는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한없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제대후 고철사업을 시작할 때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사업을 하니
수집상들의 신뢰 얻어 날로 번창해

군에서 복무하는 동안 저는 군대에서 고철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고철에 관심을 갖게 되어, 제대 후 인천에서 고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고철 수집상들에게서 고철을 구입할 때면 수집상들이 무게를 잘못 측량해 제가 돈을 덜 지불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러면 저는 반드시 수집상을 찾아가 차액을 돌려주었습니다. 양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나름대로 정직하게 장사하려고 노력한 것이 알려지면서, 수집상들에게 신뢰를 얻어 사업이 점차 안정되어 갔습니다. 그 후 1965년 덕소신앙촌에서 일하라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제강 공장에 입사하여 고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 기장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용도부에 입사한 저는 현재 기숙사 사감을 맡아 일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 길을 따르면서 은혜를 받아 시신이 아름답게 피는 것을 수없이 보게 되었는데, 가장 최근에 봤던 분은 지난 10월에 돌아가신 제갈송균 승사님이었습니다. 저는 생전에 그분을 가끔씩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며 돌봐 드리곤 했었습니다. 운명하신 후 교인들이 모여서 입관예배를 드릴 때 장례반 권사님이 생명물로 시신을 깨끗이 씻긴 후에 보았는데, 고인의 얼굴이 뽀얗고 환하게 피어서 생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한잠을 주무시는 듯 너무도 편안한 그 모습을 보면서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동안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그 크신 은혜를 받고도 말씀대로 살지 못한 제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이토록 부족하고 못난 저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오늘도 허락해 주신 귀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그날까지 모든 일에 열심과 정성을 다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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