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성신 축복을 조작이라고 보도해 동아일보 사건 터져
이옥희 권사(3) / 덕소교회수백만 명이 직접 체험한 이슬성신의 은혜를 가짜라고 보도한 동아일보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으로 찾아가 정정보도를 요청했으나 우물쭈물 해
경찰은 항의하는 교인들을 곤봉으로 때리고 창 밖으로 밀어던져
1960년 12월 10일에는 “동아일보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이틀이 멀다 하고 전도관과 신앙촌, 하나님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방 기사가 실렸는데, 그런 기사가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또다시 동아일보에서 이슬 은혜가 찍힌 축복 사진이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보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보고 체험한 은혜를 가짜라고 하니 그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기사의 정정을 요구하기 위해 12월 10일 교인들이 동아일보사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그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동아일보사 앞에서 다른 교인들과 같이 “허위 보도 정정하라!” 하는 구호를 외치다가 사람들에게 떠밀려 신문사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몇 명이 3층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어느새 경찰들이 뒤따라와서 그 복도에 늘어섰습니다. 저희가 복도 끝에 있었기 때문에 계단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복도를 지나가야 했는데, 곤봉을 든 경찰이 있으니 겁이 나서 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모여 있었습니다. 그러다 경찰이 저희를 한 명씩 잡아서 복도로 끌어내자 늘어서 있던 경찰들이 곤봉을 휘둘러 머리를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경찰이 이범옥 언니(현재 L.A.교회 권사)의 이마를 때리는 순간 핏줄기가 팍 하고 튀기더니 피가 철철 흘렀습니다. 그리고 다른 경찰이 언니를 창문 밖으로 내던져 3층에서 길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고, 언니는 계속 피를 쏟아서 입고 있던 파란색 코트가 자주색으로 물들 정도였습니다. 경찰들은 내려가는 계단을 막은 채 저희를 창문으로 집어 던졌는데, 저는 다행히 베란다에 떨어져 사다리 같은 것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저는 성북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받을 때 “신문에서 계속 허위 보도 하는 것을 참다 못해서 찾아왔는데 어떻게 경찰이 선량한 시민에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했더니 경찰관은 아무런 답변을 못 했습니다. 동아일보 사건을 생각하면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직접 체험한 은혜를 어떻게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 하며 지금도 울분으로 가슴이 떨려 옵니다.
1960년 동아일보는 이틀이 멀다하고
신앙촌과 전도관, 하나님에 대한
터무니 없는 비방기사를 싣더니
이슬성신 사진을 조작이라고 보도해
소사신앙촌 시절 저희 이웃집에는 연세가 높으신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가 살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 댁의 큰따님이 미국에서 살다가 폐병으로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권사님이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따님을 만났을 때 “한국 땅에 감람나무가 나타나셨단다.” 하며 감람나무가 성신을 내리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따님은 “어머니, 저를 꼭 신앙촌에 묻어 주세요.” 하며 간곡히 부탁했고, 그분이 돌아가신 후 유언대로 시신을 모신 관이 권사님 댁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신앙촌 묘지에 묻히기 전에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어 저는 시신을 씻기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고인은 생전에 폐병을 앓은 탓인지 북어처럼 비쩍 마른 데다 턱까지 비뚤어져 있었으며, 썩은 냄새가 코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풍겼습니다. 장례반 권사님은 먼저 축복받은 수건을 시신의 얼굴에 덮은 후 생명물로 시신을 씻기셨는데, 점점 피부가 뽀얗게 피어나며 발긋발긋한 혈색이 도는 것이었습니다. 수건을 걷어 보니 비쩍 말랐던 얼굴에 보기 좋게 살이 오르고 비뚤어진 턱도 반듯하게 돌아와 있었습니다. 지독하게 풍기던 악취도 깨끗이 사라져서 썩은 냄새를 맡으려야 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흉한 모습으로 썩어 가던 시신이 곱고 아름답게 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권능을 다시금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1961년부터 소비조합을 시작하여 이듬해 덕소신앙촌에 입주한 후에도 계속 소비조합으로 활동했습니다. 처음 신앙촌 성냥을 판매할 때부터 저는 신앙촌 물건을 믿어 주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먼저 물건을 써 보신 분들이 “신앙촌에서 만든 물건이라면 무조건 믿어도 된다.” 하며 추천해 주셔서 점점 장사가 커지게 되었고, 수십 년 동안 고객들과 신뢰를 쌓으며 한식구처럼 지내왔습니다. 소비조합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부지런하고 보람 있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저의 둘째 남동생 기창이는 고향에서 일죽제단에 다니다가 덕소신앙촌에 입주하여 운수부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요일이면 하나님께서 서울의 중앙전도관을 순회하시며 예배를 인도하셨는데, 그때 기창이는 하나님을 수행하시는 분들의 차를 운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에 기창이가 팔을 크게 다쳐서 퉁퉁 부은 채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운전 중에 잘못하여 차가 논두렁으로 구르는 바람에 팔을 꼼짝도 못 할 정도로 다쳤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인 일요일 새벽이 되어서도 팔이 아파서 움직이지 못했지만 동생은 수행원들의 차를 운전해야 한다며 집을 나섰습니다. 저는 ‘저 팔로 하루 종일 어떻게 운전을 하나.’ 하며 걱정이 되었는데, 저녁에 돌아올 때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것이었습니다. 기창이가 이야기하기를, 출발하기 전 하나님께서 안찰해 주시자 그때까지 아프던 통증이 말끔히 사라졌으며 하루 종일 운전해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정말 동생은 평소보다 더욱 생기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살펴 주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신앙촌 물건을 써보신 분들이
`신앙촌 것은 무조건 믿어도 돼`라며
추천해 주셔 장사가 커지게 되었고
수십 년 고객과는 신뢰를 쌓으며 지내
그 후 1977년에는 아버님께서 일흔여섯을 일기로 숨을 거두시게 되었습니다. 온화한 성품의 아버님은 전도관 교인은 아니셨지만 저희 형제들이 제단에 다니는 것을 많이 후원해 주셨습니다. 아버님의 장례를 전도관식으로 치르게 되어 입관예배를 드렸는데, 생명물로 깨끗이 씻긴 후에 뵈었더니 전신이 노긋노긋 부드럽게 움직이며 잠시 동안 단잠을 주무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해 주셔서 아버님은 곱고 편안한 모습으로 가셨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때면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던 모습이 많이 떠오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보살피듯 몽매한 저희를 은혜로 키우시며 이 진리를 깨우쳐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토록 귀한 은혜를 받고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그 뜻대로 살지 못한 지난 시간이 몹시도 안타깝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구원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께서 한없는 은혜로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