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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을 따라온 세월은 한마디로 ‘기쁨’이었습니다

전삼록 권사(3) / 덕소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02

원효로 구제단을 시작으로 전국에 전도관이 건설되었으며, 서울 청암동에는 이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서울중앙전도관(이만제단)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공사 현장에서 저도 모래를 나르며 즐겁게 건설에 동참했습니다. 저는 아들을 가졌을 때 늑막염을 심하게 앓은 뒤로 가만히 있어도 어깨에 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항상 무겁고 아팠었습니다. 동익이를 낳은 후에도 어깨가 아파서 업어 주지 못하니, 이웃 사람들이 아이를 업어 주면서 “젊은 새댁이 이렇게 몸이 약해서 어떡하느냐.” 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은 뒤로 그 고질적인 어깨 통증이 씻은 듯이 나아서 공사 현장에서 모래 짐을 지고도 아주 재빠르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훌훌 날아가는 듯 가벼웠던 그 시절, 함박웃음을 지으며 바쁘게 일했던 시간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낙원에 계신 지금도 은혜를 허락하시는 그 사랑 앞에
무슨 말로 다 감사를 드려야 할지 매일 새벽 무릎 꿇어
뜨거운 눈물로 구원 얻을 자격 얻기를 기도합니다

그 후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1958년 5월 1일에 아들과 함께 입주했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소사신앙촌 노구산에서 대집회가 열려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쏟아지는 소나기에 옷이 흠뻑 젖어서 이리저리 옷을 짜면서도 자리를 떠날 줄 몰랐으며, 힘차게 손뼉을 치며 찬송할 때 그 벅차오르는 기쁨은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예배에만 열중했었는데, 집회가 끝난 후 수십만의 사람들이 산을 뒤덮은 집회 사진을 보면서 ‘그때 이랬구나, 사람으로 산을 이루었구나!’ 하며 새삼 놀라워했습니다.

1962년 11월 16일, 제2신앙촌인 덕소신앙촌에 입주하던 그날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아들과 함께 이삿짐을 가지고 덕소에 도착해 보니 너무 이르게 입주해서인지 저희 집에 아직 문이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관장님과 전도사님들과 함께 오셔서 집을 둘러보시고는 부드러우신 음성으로 “누가 이렇게 문도 없는 집에 오라고 했어요?” 하시며 따뜻하게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건설대를 부르셔서 문을 달게 하신 후, 집을 향해 “쉭! 쉭!” 하시며 오래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귀한 축복의 손길이 함께하시는 곳임을 절실히 느꼈던 그때, 그 감사함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신앙촌은 참으로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푸른 한강 줄기가 굽이쳐 흐르는 수려한 경관 속에 지어진 덕소신앙촌 – 그곳에 깨끗한 신식 주택과 갖가지 공장들, 대제단을 건설하셔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찬송가 선율이 은은하게 울리는 신앙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저에게도 이런 복을 주십니까.’ 하며 기도드리곤 했습니다.

1965년부터 소비조합을 시작한 저는 다양한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면서 신앙촌 물건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품질 좋은 제품으로 신뢰를 얻어 수십 년 동안 왕래하면서 고객들과 오랜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고, 항상 활기찬 생활 속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1986년에는 원효로 구제단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윤용녀 집사님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숨을 거두어 냉장 시설이 가동되는 보관실에 있었기 때문에, 차디찬 시신이 장작개비같이 딱딱한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입술을 꽉 다문 채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고인의 얼굴은, 아주 추운 곳에 들어갔을 때 심하게 인상을 찡그린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덕소신앙촌 장례반 권사님들이 생명물로 시신을 씻기기 시작하자, 그 뻣뻣하던 시신이 점차로 부드러워지는 것을 확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장작개비같이 굳어 있던 몸이 노긋노긋하게 피어서, 움츠렸던 어깨를 쫙 펴고 팔다리가 자유자재로 움직여서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듯이 수의를 입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하게 인상을 쓰며 찡그렸던 얼굴도 곱게 피어서 온화하게 미소를 짓는 표정으로 화하여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봄날이 한창이던 그날, 미소를 띠고 있는 고인을 바라보면서 저는 속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습니다. ‘윤 집사님, 어제 일같이 기억이 나네요. 우리 같이 원효로 구제단에 다닐 때 참 재미있고 신났었지요.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은혜를 주시니 우리는 참 복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윤 집사님, 편안히 잘 가세요.’ 묘지에 안장을 마칠 때까지 교인들이 찬송을 부르며 함께해 주었고, 저는 일생 동안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고인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1990년 2월 하나님께서 낙원으로 가신 후, 신앙신보의 설교 말씀을 읽어 보던 저는 북받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원을 주시고자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다 말씀하시고 가르쳐 주셨건만 그 뜻대로 살지 못했음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늦게서야 철드는 자식처럼, 그토록 안타까워하셨던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길을 따르며 살아온 세월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저는 ‘기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천국을 향하는 길을 알았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평생토록 감사드리며 기쁨의 찬송을 불러도 한없이 부족할 뿐입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신 하나님 – 구원을 주시고자 이 땅에서 역사하셨던 그 희생의 세월을 기억합니다. 낙원에 계신 지금도 은혜를 허락하시는 사랑 앞에서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매일 새벽 무릎을 꿇을 때마다 기도보다 먼저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다. 거룩하신 뜻을 깨달아 행하게 하옵시고 그날에 구원을 얻는 자격자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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