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마을 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51

저는 1958년 초 신앙촌에 입촌해 건설대로 일했습니다. 맨 처음에 한 일이 시멘트 하역 작업이었습니다. 줄지어 몇 시간 하역을 하다 보면 먼지로 두 눈만 반짝이는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기쁨은 넘쳤고 힘드는 줄 몰랐습니다. 소사신앙촌 건설대원이 2,000여 명이었는데, 새벽예배가 끝나고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피곤하지 않았고 하룻밤만 자고 나면 집 몇 동씩 지어졌습니다.

신앙촌 주민들의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은 새마을운동의 효시가 돼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 몰려와
신앙촌에는 생기와 활기로 가득 차

그때 우리는 아무리 힘든 일도 힘든 줄 모르고 은혜 가운데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힘들고 무거운 일은 저마다 하려고 나서다 보니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났으며 나이 어린 사람이라도 선생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남이 나보다 신앙적으로 앞섰다는 높임말이었습니다.

은혜의 마을 신앙촌

소사신앙촌 입구

신앙촌 주민들의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은 새마을운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초가집들이 양옥집으로 다시 지어지고 제단도 지어지자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식구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왔습니다. 신앙촌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고 입주한 식구들은 생기와 활기로 가득 찼습니다. 팔도에서 모인 사람들이지만 한식구 같았으며 범박리 골짜기는 찬송 소리가 넘쳤습니다. 어디 가나 은혜 창파로, 그곳은 세상과 다른 별천지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려고 하루에도 수십 대의 관광차가 올 정도의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조응화 승사(신앙체험기 3집 수록)

한번은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신앙촌을 건설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혜 받은 교인들이 한곳에 모여 살게 된다고 하시며 이런 주택을 지을 거라고 기다란 그림을 펼쳐서 보여 주셨습니다. 지붕에 산뜻한 색깔을 입힌 신식 양옥이 그려져 있었고, 우리 힘으로 먹을 것, 입을 것을 만들도록 공장을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1957년 11월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이만제단 교인들이 전세 버스를 타고 신앙촌을 견학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신앙촌에는 하나님께서 그림으로 보여 주셨던 양옥 주택이 속속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전쟁으로 허물어진 서울만 보다가 새롭게 건설되는 신앙촌을 보니 참 놀라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귀한 신앙촌에 들어오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은혜의 마을 신앙촌

소사신앙촌 주택지대 모습 (1958년경)

이듬해인 1958년 2월 소사신앙촌에 입주한 저는 직조 공장에서 근무했습니다. 원래 직조 기술이 있었던 저는 다른 직원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었는데 모두들 열심히 기술을 배우며 일했습니다. 그러나 기술자가 대부분인 여느 공장과 달리, 직조를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모여서 제품을 만드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보며 신앙촌의 공장은 다른 공장처럼 돈만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먹고살 기반을 마련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공장을 세우시고 희생과 수고를 하신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습니다.  김동남 권사(신앙체험기 420회 수록)

우리의 신앙촌은 놀라운 속도로 변해 갔습니다.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집이 생기고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수돗물은 지하수였는데 하나님께서 물탱크에 아침저녁으로 축복하셨습니다.

덕소신앙촌 공장지대 모습(1962년경)

그렇게 2년 동안 신앙촌 안에서 은혜를 받고 살다 보니 시인 아닌 시인이 되었습니다. 따사롭게 빛나는 햇빛도, 바람 부는 언덕도, 공중에 나는 새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으며, 이 모든 자연의 이치를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길을 걷다 길바닥에 툭 튀어나온 돌을 보면 저 돌에 다른 사람이 걸려 넘어져 다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어 그 돌을 치워야만 했고, 만약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하면 괴로워서 못 견딜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죄를 의식으로 분별하게 되었으며 제 마음이 솜같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기천 집사(신앙체험기 1집 수록)

저는 1958년 5월, 그리던 소사신앙촌에 입촌하게 되었습니다. 입주하자마자 수예부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면서 ‘이 상품 속에 은혜로 함께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쉼 없이 흘러나왔습니다. 그해 9월에는 제단 건설대의 운반부에 들어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흙벽돌, 모래 등 건축 자재를 나르며 신나게 일했습니다. 건설대원들 모두 ‘힘든 일은 내가 먼저’라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배려하였고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시로 현장을 돌아보시며 안수 안찰을 해 주셨기에, 일하는 중에도 향취가 진동하고 생명물이 시원하게 마셔지며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에도 더운 줄을 몰랐습니다. 때론 안찰하실 때 매 사람의 죄를 지적하시며 심령의 정도를 드러내시니 참으로 떨리고 두려웠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못 한 개라도 자기 것이 아니면 집어 가지 말라.” 하시는 등 그때그때 주시는 말씀이 곧 법이었습니다. 자유율법을 지키며 맑게 살고자 노력하는 곳이었기에 ‘주인 없는 상점’은 신앙촌의 얼굴이기도 했습니다.

그 후 1962년 덕소신앙촌이 세워졌으며 1970년부터 부산 기장에 제3신앙촌이 건설되면서 하나님께서 매일 비행기로 왕래하시며 건설을 진두지휘하셨습니다. 기장신앙촌에서는 만 평이 넘는 1동 건물의 2층에 수예, 메리야스, 양재 공장 등이 칸막이 없이 들어서서 마치 하나의 공장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십 개 공장의 생산과 판매를 일일이 체크하셨을 뿐 아니라 주일마다 서울 지역의 중앙 전도관에서 순회 집회를 하시는 등 몸이 만 개라도 모자랄 일을 홀로 감당하셨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무에서 1.2.3 신앙촌을 건설하신 하나님. 오로지 가지들을 위하셨던 땀과 희생과 사랑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진하옥 집사(신앙체험기 9집 수록)

저는 1990년 3월 초 기장신앙촌 경비 책임자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장신앙촌 발전상을 사진에 담아 앨범이나 슬라이드 마운드에 정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96년 3월 16일 새벽 4시경 새벽예배에 가려고 밖에 나갔다가 희한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정문에서 마주 보이는 생명물 탱크 위에 하늘에서 밝은 광채가 환하게 비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즉시 사진기를 가지고 나와 그 광경을 촬영하여 현상해 봤더니 놀랍게도 초창기 때의 축복과 같은 현상이 남겨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1996년 11월 16일 추수감사절 전날 신앙촌에 내린 이슬성신

또 그해 11월 16일 밤 9시에서 10시에 더욱 놀라운 광경이 기장신앙촌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그날 저녁은 추수감사절 전야였습니다. 그때 샘터 공원에서는 축하 음악 행사가 한창이었는데, 갑자기 동쪽 대제단 신축 부지 위 하늘에 기둥같이 내리 드리운 화려한 50여 개의 빛이 나타났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놀라운 광경은 신앙촌 주민은 물론,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든 국내외 교인 7,000여 명이 목격했습니다.

1996년 추수감사절 전야 신앙촌
상공에 아름다운 빛기둥이 나타나
이 놀라운 광경은 신앙촌에 온
국내외 교인 7,000여 명이 목격

저는 이 신기한 광경을 촬영 팀 4명과 함께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현상을 해 본 결과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기둥 빛줄기와 더불어 각양각색의 축복이 찍혀 있었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생생한 증거이며, 신앙촌 일원에는 이슬성신이 줄곧 내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일천 관장(신앙체험기 4집 수록)

지난 1999년 교직에서 정년 퇴임한 저는 기장신앙촌에 입주하여 신앙촌 인근 동부리에서 경비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신앙촌 상공에 찬란한 빛으로 은혜가 내리는 것을 자주 목격했는데, 경비원들뿐 아니라 신앙촌에 있는 주민들과 도로에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다 함께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밤하늘에 선명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성신을 보면서 저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정수길 승사(신앙체험기 9집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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