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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받으니 병마는 사라지고 마음속엔 희망의 빛이 비쳐

김후순 집사(1)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403

저는 1928년 함경남도 함흥의 부유한 농가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함흥에서 손꼽히는 지주이면서도 아끼고 절약하는 생활을 하셨으며, 저희 형제들에게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저는 아홉 살 때 동네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 이야기를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다는 노아 이야기는 큰 놀라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린 마음에 하나님 말씀을 잘 따르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납니다.

20대 젊은 나이에 중병을
6년간이나 앓으면서 죽음이
가까왔다는 절망 속에 살다가 친구의 권유로 하나님의
남산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해

1945년 8.15 해방 후 저는 식구들과 같이 이남으로 내려와 서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스무 살 무렵부터 특별한 이유 없이 자주 피곤하며 옆구리에 통증이 느껴졌는데, 나중에는 숨이 자주 가쁘고 소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늑막염이 심각하다고 하여 1949년 5월경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두 달 정도 치료를 받았으나 별다른 차도가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복막염까지 겹쳐서 임산부처럼 배가 불러오고 허리를 조금만 구부려도 배가 몹시 아파서 그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아무래도 회복이 어렵겠다고 하여 퇴원한 후 시골에서 요양하면서 한약을 먹었습니다. 그때는 조금씩 낫는 것 같았는데 서울에 돌아온 뒤로 갑자기 폐가 나빠지더니 급기야는 핏덩어리를 쏟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웃에 살던 의사가 빨리 병원에 가 보라고 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약을 먹었지만 수시로 각혈을 하는 것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피를 쏟았던 저는 그런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 사람들과 왕래를 끊어 버린 채 외롭게 지냈습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 모습은 해골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며, 저를 본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아까워서 어쩌나.” 하며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6년이나 중병을 앓으면서 저는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둡고 험한 바다에서 항해하던 배가 방향을 잃고 헤매는 모습처럼 아무리 둘러봐도 살길이 없어 막막한 심정이었습니다.

그 후 1955년 어느 날, 이웃집 여대생 창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남산에서 부흥집회가 열리는데 거기서 병자들이 많이 낫는다며 집회장에 같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데 집회에 간다고 낫겠니? 나는 이러다가 세상 떠나는 거야.” 하며 내키지가 않았습니다. 그래도 창미는 그 집회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중환자가 일어나 뛰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것을 봤다면서 당장에 가 보자고 재촉했습니다. 창미가 아픈 저를 생각하여 간곡하게 권유하는 것을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운이 없어서 혼자 거동할 수 없었던 저는 창미와 창미 어머니의 부축을 받아 남산집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신 주~”찬송을 손뼉을 치면서 힘차게 부르는 순간
가슴이 탁 트이며 온 몸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워지고 진한 꽃향기가
맡아지는데 남산집회에서 맡았던 바로 그 향기였습니다. 찬송가 가사가 가슴에
울리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면서 괴로웠던 마음은 사라졌습니다.

남산공원의 집회장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천막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저희 일행은 끄트머리에 간신히 끼어 앉았습니다.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유명한 분이 이 집회를 인도하시며 그분이 나오시기 전까지 준비 찬송을 부른다고 창미가 알려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손뼉을 치면서 “나의 기쁨 나의 소망~” 하는 찬송을 불렀는데 저는 손뼉을 치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 찬송을 잘 몰라서 따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들만 빼곡하게 앉아 있을 뿐 꽃향기가 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백합꽃 향기 같은 아주 좋은 향기가 맡아지니 ‘어디서 향기가 나지?’ 하며 의아했습니다.

준비 찬송이 계속되면서 저는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병석에서 지내며 제대로 걷거나 앉아 본 적이 없었던 저는 남산까지 간 것도 힘에 부치는 데다가 사람들 틈에 비좁게 앉아 있으려니 몹시 괴로웠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등단하실 때까지 참아 보려고 애를 썼지만 너무 힘들어서 준비 찬송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저를 부축하느라 창미와 창미 어머니도 함께 왔습니다. 그다음 날과 다음 날에도 창미의 권유에 못 이겨 남산집회에 가긴 했지만 집회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회에서 들었던 “나의 기쁨 나의 소망~” 하는 찬송이 계속 귓가에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창미에게 그 찬송을 배우고 나니 가사가 참 좋아서 계속 부르고 싶었습니다. 저는 남산집회에 참석했던 창미네 식구들과 함께 모여 앉아서 집회에서 했던 것처럼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
진한 향기가 맡아지면서
몸이 날아갈듯이 가벼워지고 어둡고 절망스럽던 마음은
사라지고 병이 낫는 것을 느껴

그렇게 매일 찬송한 지 보름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손뼉을 치면서 힘차게 찬송하는 순간 가슴이 탁 트이며 온몸이 날아갈 것같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진한 꽃향기가 맡아지는데 남산집회에서 맡았던 바로 그 향기였습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찬송가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울리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병마에 시달리면서 괴롭고 어두웠던 마음을 털어 버리고 앞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찬송을 부른 후로 저에게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피를 쏟는 일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기운이 없고 무겁기만 했던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이었습니다. 부축을 받고도 힘겹게 걸었던 제가 차츰 힘이 생겨서 혼자 거동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모습을 본 창미는 “이제 병이 나으려나 봐요!” 하며 기뻐했습니다. 계속 악화되기만 하던 병이 조금씩 좋아지면서 병원에 가고 약을 먹는 횟수도 줄어들었습니다. 어두운 절망뿐이었던 저의 마음에도 한줄기 희망의 햇살이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김후순 집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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