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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기쁨으로 마음이 환하게 피어나다

발행일 발행호수 2522

지난 이슬성신절에 방영된 하나님 말씀의 주제는 “최고의 은혜는 이슬성신과 생명물”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백합화같이 아름답게 변화시켜 구원을 주시는 최고의 은혜라 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증거하는 많은 체험담 중에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고 마음의 천국을 이루게 된 체험담을 실었습니다.

저는 6·25 전쟁이 끝나고 서른네 살 무렵에는 저 스스로 교회를 찾아 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집안에서 속상한 일을 겪고 마음이 몹시 괴로웠는데,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을 믿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말을 듣고 함평읍 장로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열일곱 살에 시집간 후로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농사를 지었지만 남편은 해마다 추수한 곡식을 팔아 탕진해 버렸고, 6·25 전쟁 때는 남편이 집을 저당 잡히고 혼자 피난 가는 바람에 저는 어린 딸을 데리고 길거리에 나앉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오랫동안 앓아 왔던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한 후로는 매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저에게 심한 매질까지 하면서 하루하루가 힘겹고 괴로웠습니다. 그래도 저는 남편과 아들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장에 나가 장사를 했고, 교회에 계속 다니며 하나님을 믿어서 마음이 편안해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 후 1964년경 서울로 올라가 살면서 이만제단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박 장로님의 인도에 따라 “내 영혼이 은혜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하는 찬송을 부를 때 지나온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전도관 다니며 어두운 마음 벗어나
왜 그리도 기쁘고 즐거운지
연신 함박웃음 짓는 날이 많아져
어려운 형편 좋아질거란 희망도 생겨

당시 저희 식구들은 어려운 형편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엄마 품을 떠나 객지에서 고생하는 아들딸을 생각하면 저는 가슴이 못 견디게 쓰리고 아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쓰고 발버둥 쳐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으니 이런 세상을 더 살아서 무엇 할까 싶었습니다. 낮에는 먹고살기 위해 바쁘게 일하다가도 밤이 되면 ‘하나님 저 좀 데려가 주세요.’ 하며 한숨을 짓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찬송가 가사대로 슬픔 많은 세상이라는 것을 절절히 느끼며 어느새 눈물이 흘렀습니다. 원래 저는 눈물이 없는 편인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슬픔 많은 세상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면 천국으로 화한다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도 은혜를 주시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드릴 때 어느 순간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며 좋은 향기가 머리 위에서 쏟아 붓는 것처럼 진하게 맡아졌습니다. 그때부터 눈물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흘러 그날 입고 간 치마 한 폭을 흥건히 적셨습니다.

그 후로 제단에서 예배드릴 때마다 왜 그리도 기쁘고 즐거운지 연신 함박웃음을 짓게 되었고, 어려운 형편에 낙심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꼭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단에 다니면 다닐수록 ‘이 길이 좋은 길이고 내가 살길이고 내가 갈 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귀임 권사(신앙체험기 437회 게재)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저는 돌이 되기 전에 부모님을 여의고 고달픈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결혼한 큰오빠네 집에 얹혀살다가 전주로 입양됐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 집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그 후 열여섯 살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하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부모 없이 막되었다는 핀잔을 듣지 않으려고 항상 말씨와 몸가짐을 조심하며 살았습니다.

서울 신문로의 가정집에 일할 때 이만제단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1957년 4월 개관집회 중에 하나님께서 참석자 모두에게 안수해 주셔서 저는 처음으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제 머리에 닿는 순간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머리 위에서 “쏴아-” 하고 쏟아 붓는 것 같았습니다. 그 물이 머리부터 가슴까지 내려와 온몸이 말할 수 없이 시원하게 느껴졌습니다. 깜짝 놀라 머리와 옷을 만져 봤지만 하나도 젖지 않아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좋은 향기가 진동하는데 어느 순간에는 고급 향수 냄새 같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참기름을 짜는 고소한 냄새 같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좋은 향기가 따라오는 것처럼 계속 맡아졌습니다. 그 향기 속에 몇 시간을 걸어도 피곤하지 않았고 햇덩이 같은 기쁨이 솟아올라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제 나이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이만제단에 다니면서 저는 “요새 좋은 일 있어요?”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항상 표정이 없던 제가 자주 웃는 것을 보고 이렇게 웃음이 많은 사람인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을 여의고 마음 붙일 곳이 없었던 저는 몹시 외로웠습니다. 한겨울 시냇물에 빨래할 때면 재잘거리며 학교 가는 또래들을 바라보다 ‘왜 난 엄마가 없을까.’ 하며 꽁꽁 언 손으로 눈물을 훔치곤 했습니다.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힘겹고 서러웠습니다. 그랬던 제가 전도관에 다니며 웃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예배 시간에 향취가 진동할 때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오니 이렇게 편안하구나!’ 한때 입양되어 엄마 아빠가 생긴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느껴 보지 못한 편안함이었습니다. 부모를 가진 사람도, 재산을 가진 사람도 전혀 부럽지 않았고 제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습니다. 나를 편안하고 기쁘게 해 주시는 은혜가 참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이복례 권사(신앙체험기 440회 게재)

저는 1957년 10월 서울 이만제단에서 집회가 열렸을 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수하시고 “병 나은 사람 일어나라!” 하시면, 놀랍게도 벙어리가 말문이 트여 더듬더듬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등 놀라운 기적이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저기서 무슨 병이 나았다, 무슨 은혜를 받았다 하며 이야기하는데, 저는 며칠이 지나도록 받아지는 것이 없어서 몹시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중에 하나님께서 통성기도를 하라 하시니 군중들의 기도 소리로 제단은 금세 떠들썩해졌습니다. 저도 자리에 엎드려서 기도드리는데, 갑자기 뜨거운 불이 심장 쪽으로 들어오더니 배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입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느낌이 너무나 분명하고 생생해서 얼른 입에 손을 대 보았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고, 그때부터 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며 온몸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시원했습니다.

하나님을 뵙고 이 길을 따르면서
모든 두려움과 근심 간곳없이 사라져

그렇게 은혜를 받은 후부터는 아무리 화려한 곳에 가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고, 아무리 좋은 것을 봐도 가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바람을 부는 기계로 풍풍 바람을 넣어 주듯이, 제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풍풍하며 샘솟아 나는데 그 기쁨을 세상의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문헌에서도 보지 못했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기쁨과 즐거움이 나날이 새롭게 채워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10대에 접어들어 태평양전쟁과 육이오동란을 겪으면서 ‘앞으로 험한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과 근심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뵙고 이 길을 따르면서 모든 두려움과 근심이 간곳없이 사라져 버리고 일생을 기쁘게 지내왔습니다. 천지는 변하여도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으시기에, 그 말씀대로 아름답게 살아서 그날에 멀리서라도 뵈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이교선 권사(신앙체험기 352회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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