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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사회의 정착을 위하여

이택광 /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발행일 발행호수 2513

이택광 /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우리에게 새로운 것은 언제나 물 건너온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빠르게 체제의 원리를 파악해서 적응하면 별 다른 노력 없이도 새로운 것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기술습득이었다. 기술과 동일한 차원에 놓여 있는 것이 외국어 능력이기도 했다. 기술 아니면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생존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전국 방방곡곡에 영어학원이 성업을 이루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독일의 루드비히 뷔히너나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는 진화론의 법칙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뷔히너는 『종의 기원』에 대한 서평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일컬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완전함의 법칙”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그 법칙에 따르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지금보다 항상 더 아름답고 더 높고 더 완전한 형태로 발전된다는 것”이라고 해석했는데, 이것은 사회현상을 속류적으로 설명하는 오류였을 뿐이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적자’(the fittest)라는 것은 반드시 강한 개체를 의미하지 않았다. ‘적자’는 환경에 제대로 적응한 개체였는데, 사회진화론은 그 반대였다. 강한 개체만이 생존할 수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계급갈등을 ‘자연도태의 법칙’에 맞춰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진화론적인 관점에 따라 사회원리를 설명하면서 형성된 것이 생존경쟁과 우승열패라는 이데올로기이다.

사회는 자연과 유사한 법칙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동물의 왕국’처럼 인간도 자연의 법칙에 제대로 적응해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것을 ‘자연화’(naturalization)라고 부르는데 이런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법칙에 복종해야만 하고 사회발전을 자연도태의 법칙에 따라 순응시켜야만 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사회진화론은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의 문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이런 논리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강자생존 논리야말로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만들어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근대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타인보다 먼저 부를 획득해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거나 권력의 심층부에 올라앉는 것을 성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정의보다는 사회를 약육강식으로 설명하고 있기에 ‘강한 자’가 되어서 생존해야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은 단언적 명령이었다. 이런 문제의 발단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정의라는 개념은 ‘공평무사’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정치나 종교계는 물론 자신들만을 위한 이기주의에 집착하여 자신들의 잣대로 입맛에 맞게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였다. 이런 정의는 공평무사나 능력주의와는 무관하다.

능력에 따라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는 사회를 정의롭다고 할 수는 없다. 능력 자체가 불평등한 조건에서 발휘되어야한다는 현실을 바꾸는 것이 이 정의의 문제일 것이다. 정의를 세우는 일은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올바른 양심을 길러주는 일이며 이들이 자라게 되면 거짓과 권모술수는 자연적으로 발을 붙일 수가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또 티끌만치도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에서 정의가 시작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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