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38> 홀로코스트의 뿌리를 찾아서-①
세계 종교 탐구 <38>“하마스를 지구상에서 쓸어버릴 것”
“하마스는 사람이 아니다.”
“하마스를 완전히 소탕시키겠다.”
“하마스는 파괴돼야 한다.”
이는 언론에 표명한 이스라엘 지도부들의 입장이다. 작년 10월 7일 개전한 이래,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본거지가 있는 가자지구에 14만 번 이상 폭격을 가했고, 수많은 하마스 대원들을 사살했다. 문제는 폭격의 피해가 하마스 무장 대원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자지구 대부분이 완전히 파괴되며 인구의 85% 이상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됐다. 총사망자 수는 2월 1일 기준 2만 7천 명이 넘었으며 그중 3분의 2는 여성과 어린이였다.
지난달 26일,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이스라엘에 ‘집단학살 방지’ 명령을 내렸지만,<참고자료1,2>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궤멸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던 의지를 이어가고 있다.<자료1>
그런데 불과 80여 년 전에는 유대인들이 집단학살로 멸족의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다. 당시 유럽 전체 유대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홀로코스트는 일반적으로 히틀러의 극단적 인종주의와 나치의 조직적인 선동으로 일어난 사건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는 전 유럽적 현상으로서, 유럽인 수백만 명이 자신들의 오랜 이웃인 유대인의 종말을 원치 않았더라면 전혀 발생할 수 없었던 사건이라고 한다.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혐오는 특정 시기나 특정 집단에서 갑자기 나타났던 현상이 아니라, 오랫동안 유럽 사회 전반에 만연했던 대중적 심리 현상이었다. 전 유럽에 이미 단단하게 뿌리내려진 ‘반유대주의’라는 배경이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유대인들은 언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으며, 그 증오가 어떻게 전 유럽에 확산될 수 있었을까?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반유대주의라는 혐오의 뿌리가 홀로코스트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 반유대주의가 시작되다
반유대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깊고 오래된 증오’라 불린다. 다른 어떤 증오도 이토록 오랫동안 지속되며, 시간이 갈수록 더욱 체계화되고 악랄해진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이 증오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구약성경을 역사서라 가정한다면, 유대민족은 기원전 고대 시대부터 타민족과 동화되기 어려운 특징을 보여왔다. 다신교가 주를 이루던 고대 사회에서 유일신 신앙을 고집하고 선민적 배타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주변국에 반감을 사 갈등을 빚은 사건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유대인들을 향한 증오와 차별, 더 나아가 배척하고 절멸하려는 사상’을 가리키는 ‘반유대주의’의 시작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학자들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반유대주의의 시작을 약 2천 년 전으로 얘기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인 서기 33년, 기독교의 교주 예수가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혀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예수를 체포하고 로마의 재판에 넘긴 것은 다름 아닌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범법자라는 것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했다는 것, 스스로 왕이라고 하며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는 등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도모했다는 점 등을 고발하고, 십자가형에 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위 이야기는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성경에서 가르치는 내용으로, 이 사건 이후 기독교 세계에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신의 선택을 받은 축복받은 민족이 아닌, 신의 아들이자 메시아라 믿던 예수를 죽인 살인자, 신과 인류에게 미움받는 저주받은 민족으로 인식되게 되었다.<자료2>
이 밖에도 신약성경에는 유대인을 ‘네 아비인 악마’의 자식으로 일컫거나 ‘사탄의 회당(유대인들의 예배 장소)’이라며 부정적으로 언급한 사례가 많은데, 기독교는 본래 유대교에서 파생된 종교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구약성경을 같은 경전으로 공유하고 있으며, 교주이자 신앙의 대상인 예수부터 철저히 유대적 토양과 배경에서 성장한 유대인이었고, 성경의 주요 인물인 예수의 제자들과 증인들 또한 대부분 유대인이었다. 이렇듯 기독교의 정체성은 유대적인 뿌리 위에 정립되었으나, 기독교는 ‘탈유대화’라는 신학적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대교로부터 분리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에게 씌운 죄목인 “신의 아들 살인죄”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의 초석을 제공한 최초의 신학 이론이었다.
유대적 뿌리를 부인하는 흐름은 점점 교부(敎父: 기독교 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이들)들의 반유대적인 설교로 이어졌다.
<자료3> 예를 들어 2세기의 교부 오리게네스는 70년, 유대-로마 전쟁의 결과 유대인들이 국가를 잃어버리고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된 상황을 두고 “유대인들은 사악한 민족이기 때문에 재앙을 받고 있는 것이다. 사상 유례없는 극심한 징벌을 받고 있는 것은 다른 어떤 죄악들보다도 그들이 예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고 설교했으며, 4세기의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회당에 불을 지르는 것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라고 설교했다. 4세기의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황금의 입’으로 불릴 정도로 당시 가장 위대한 설교가였는데, 그는 유대인을 미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 가르쳤고, “회당은 갈보의 집이며 극장이다. 그곳은 도적의 소굴이며 들짐승들의 거처고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 모인 곳이다. 사탄의 은신처이며 멸망의 구덩이요 무저갱이다.”라고 설교하였다. 이런 식으로 초기 교부들은 기독교에서 유대적인 뿌리를 제거해 갔고, 이는 4세기에 접어들어 로마제국의 기독교화와 함께 반유대적인 법령들의 발표로 이어졌다.
기독교에서 만들어 낸 ‘예수 살인죄’라는 독특한 신학 이론은 ‘예수를 죽인 유대인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것이 하느님의 원수를 갚는 것’이라는 우스꽝스런 신학이 되어, 2천 년간 유대 민족을 향한 끝없는 미움과 증오, 집단학살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 반유대주의가 확산되다
반유대주의는 역사의 한 시대에만 성장하고 꽃피운 것이 아니라, 2천 년간 철저하게 기독교의 역사와 맞물려 끊임없이 반복되고 강조되었다. 역사적으로 반유대주의를 확산시킨 대표적인 사건들은 십자군 전쟁, 흑사병, 의식 살해(Ritual murder), 포그롬(pogrom) 등이 있다.
유대인들에 대한 통속적인 종교적 증오심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주입하게 된 계기는 십자군 원정이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1095년 교회 회의를 소집하고 전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며 “이것은 거룩한 전쟁이다. 십자군에 참여하는 자는 어떤 죄든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외쳤다. 십자군 전쟁의 광풍과 당시의 사회적 혼란기를 틈타 초대교회 때부터 교부들이 설교해 온 ‘유대인은 메시아를 죽인 흉악한 민족’이라는 반유대적인 악령이 되살아났다. 폭도로 변한 십자군들은 굳이 먼 곳에 있는 무슬림들을 치러 가기 전에 자기들 안에 있는 반기독교 세력인 유대인들을 먼저 치는 게 낫다는 그럴듯한 주장을 폈다. 군중 가운데 한 명이 이렇게 외쳤다. “유대인을 죽이고 네 영혼을 구원하라”
십자군은 칼과 십자가를 내세우면서 이슬람에게 했던 동일한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칼은 무슬림들은 물론 유대인들을 죽인 피로 물들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여, 우리는 당신을 찬양합니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회당에 불을 질러 안에 있던 유대인들이 산 채로 불에 타 죽게 하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눈에 이러한 십자군의 학살은 불(不)신앙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정당하고 빛나는 심판처럼 보였다.
14세기 중세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창궐해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은 적이 있다. 이때 유대인들이 우물이나 샘의 근원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 퍼졌고, 흑사병으로 인한 비극과 고통의 책임은 모두 유대인에게 돌아갔다.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학살당했고, 살해당한 시체들은 흑사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 위에 덧쌓여졌다. 인육이 불타는 연기로 자욱했던 당시의 유럽 대륙은 종교의 탈을 쓴 종교인들이 벌이는 광란의 잔치로 인해 해가 저무는 줄 몰랐다.
중세 이후 유럽 그리스도교도들의 반유대주의는 이른바 ‘의식 살해’라는 신화를 통해서도 확산되었다. 실제 ‘의식 살해’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교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어 유럽 전역에 뿌리내린 보편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였다. ‘의식 살해’란 유대인들이 매년 유월절 때마다 기독교인 남자아이를 살해하여 그 피를 유월절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에 찍어 먹는다는 미신적 믿음이다.<자료4> 1144년 영국 노리치 마을에서 한 남자아이가 실종됐을 때, 한 유대인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유대인들이 유월절 피의 제사를 위해 그 아이를 살해했다’고 거짓 자백한 것을 계기로 중세 시대 의식 살해 혐의가 산불처럼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월절 전후로 어린이가 사라지면 유대인들은 ‘의식 살해’ 혐의로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일례로 1475년 이탈리아의 트렌토에서 한 소년이 살해당하자, 도시의 유력가들은 유대인들에게 의식 살인 혐의를 씌워 몰살시켜 버렸다.
1215년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소집한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모든 유대인들이 유대인 표지를 착용하도록 규정했다. 유대인을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유대인들에게 배지를 달게 하고 다른 옷을 입게 한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그 배지가 노란색으로 된 동그라미였고, 이것은 나중에 독일의 나치가 사용했던 노란색 별과 비슷했다.<자료5>
포그롬은 ‘학살하다, 파괴하다’를 뜻하는 러시아어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살해나 폭력, 재산 파괴 및 방화를 목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폭력행위를 의미한다. 좁은 의미에서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을 ‘홀로코스트’라 한다면, 러시아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은 ‘포그롬’이라고 한다. 1881년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자, 유대인이 황제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게 되었고, 이후 40년간 약 천여 건의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포그롬 당시 유행했던 “유대인을 구타하여 러시아를 구원하라”라는 구호는 “유대인을 죽이고 네 영혼을 구원하라”는 십자군의 구호와 닮았다.
1903년 일어난 키시네프 포그롬은 의식 살해 혐의가 원인이 되어 발생했다. 4월 6일, 한 6살 소년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고, 러시아제국 서남부 도시 키시네프 시민들은 한순간에 광기에 휩싸였다. 오리무중에 빠진 6세 아동 살해 사건의 범인이 유대인으로 추정된다는 기사들이 보도됐기 때문이다. 3월과 4월 내내 러시아 정교회의 부활절과 유대교 절기인 유월절이 겹친 가운데, 러시아인 사이에서는 유대인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기독교인을 제물로 바친다는 루머가 퍼져있었고. 부활절 직전까지 40일 금식이 끝나 심리적 해방감에서 갖은 음식과 술을 만끽한 러시아인들은 ‘거룩한 종교 행위’처럼 유대인들을 죽였다.<자료6> 사태가 진정되고 나서 얼마 뒤 소년을 죽인 진짜 범인은 친척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