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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의 은혜 받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나

최재복 권사(2) / 소사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143

지난호에 이어서

그 후 1956년 5월에는 서울 제2운동장에서 하나님 집회가 열렸는데, 저는 집회가 시작되고 며칠 후부터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집회장에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서 끝이 어딘지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자리가 비좁아 다른 사람 무릎 위에 겹쳐서 앉았어도 불편한 줄을 몰랐고, 사람들과 함께 북을 치며 찬송을 부르는 시간이 너무나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집회에 참석한 첫날, 저는 집회장에서 기도하며 밤을 새웠습니다.
다음 날 아침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우연히 어느 여자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30대로 보이는 그 여자 분은 화장실 옆에서 눈을 비비고 있었는데, 그분이 하는 말이, 자신이 장님이었다가 이 집회에 와서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워서 그게 정말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여자 분은 정말이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해 집회에 올 때만 해도 다른 사람을 붙잡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옷을 이리저리 보더니 까만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어머, 내 행색이 이래서 어떡하면 좋아?”라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그전에 저는 하나님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집회를 하시면 장님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등 기사이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런 기적을 제 눈앞에서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집회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손이 제 머리에 닿는 순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주체를 못할 정도로 굉장히 뜨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불덩어리가 제 몸 안에 들어온 것만 같았습니다. 그전에 불성신을 받으면 뜨겁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제가 직접 체험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왠지 모를 기쁨이 제 마음에서 솟아나기 시작하는데, 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걱정도 없고 근심도 없는 마음에 난생처음 느껴 보는 기쁨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부엌에서 밥을 할 때마다 부지깽이로 박자를 맞춰 가며 즐겁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늘 찬송이 입가에 맴돌며 매일 매일을 감사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 후 1963년 저희 가족은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웃에 살던 장순덕 집사님이라는 분은 소사신앙촌 정문 밖에서 페인트 가게를 했었습니다. 페인트 가게는 연탄을 땠는데, 어느 날 장 집사님이 가게에서 연탄을 피워 놓고 잠이 들었다가 그만 연탄가스가 새어 나오는 바람에 가스에 중독되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저는 장 집사님이 돌아가시고 다음 날 그 집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신의 피부가 뽀얗게 피어나고 혈색이 도는 것이 생전보다 훨씬 예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그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집에 와 있던 고인의 동서에게 어쩜 이렇게 시신이 예쁘냐고 물었습니다. 전날 장 집사님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서는, 그때부터 계속 시신에게 생명물을 먹여 주었더니 이렇게 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 집사님은 너무나 고운 모습으로 입관을 했습니다.
저는 마흔 살 되던 1965년부터 신앙촌 물건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시작했습니다. 몸이 약했던 저는 소비조합 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면, 버스에서 바로 내리지 못하고 한참을 쉬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 신촌을 시작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장사하는 동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해져서, 커다란 보따리도 가볍게 들고 활기차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작은 물건이라도 신앙촌 물건을 쓸 때면 제 마음이 그렇게 기쁘고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엑슬란 내복, 엑슬란 속치마는 당시 없어서 못 팔 만큼 히트 상품이었고, 신앙촌에서 만든 옷은 이 사람이 입으면 이 사람대로 예쁘고, 저 사람이 입으면 저 사람대로 예쁘다면서 고객들이 무척 좋아했습니다. 제가 신앙촌 물건을 들고 찾아가면 어떤 고객들은 자기 친구들이며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신앙촌 물건을 소개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신앙촌을 믿고 좋아하는 고객들과 오랫동안 한가족처럼 지냈습니다.
1994년에는 소사신앙촌에서 저와 가까운 사이였던 한봉렬 권사님이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입관예배를 드린 후 시신을 보았더니, 얼굴에 주름살이 다 펴지고 너무나 뽀얗게 피어서 정말 열 일곱 살 소녀 같았습니다. 제가 “어머나, 권사님 17세네.” 하고 말하자 옆에 있던 따님(정성숙 권사)이 “그렇지요? 우리 어머니 정말 소녀 같지요?” 하며 되물었습니다. 평소 고운 마음씨로 진실되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노력하셨던 한 권사님은 아름답고 편안한 모습으로 피어 가셨습니다.
40년 동안 소사신앙촌에서 살아온 저는, 최근 소사신앙촌이 재개발되면서 현대 홈타운 아파트를 보상받게 되었습니다. 처음 소사신앙촌에 들어왔을 때는 방 두 칸짜리 작은 집에서 살았는데, 2003년에 45평 넓은 아파트를 보상받아 입주를 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소사신앙촌에 들어올 때 밀가루 한 포대와 쌀 반 가마밖에 가진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저와 자식들 모두 유복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가난한 형편에 마음까지 곤궁했던 저를 불러 주셔서 한평생 기쁨을 누리며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항상 저와 동행해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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