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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의 불기둥 보고 용산소방서에서 불났다고 달려와

강문형 권사 / 인천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224

강문형 권사 / 인천교회

1941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서울 중구 회현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3남 2녀 저희 형제들은 독실한 장로교인이신 어머니(故 신옥선 권사)를 따라 주일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장로교회에 다녔으며, 숙명여대 교수이신 아버님도 젊었을 때 교회에 열심히 나가시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전도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충무 장로교회에 다녔는데, 언젠가 주일학교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마음속에 쏙 들어왔습니다. “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하나님을 뵙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 있었어요.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초라한 행인의 모습으로 그 집을 찾아가셨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못 알아보고는 하나님이 떠나가신 뒤에야 무척 후회를 했어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저는 어린 마음에 ‘이상하다, 왜 하나님을 못 알아봤을까? 나는 하나님이 우리 집에 오시면 정말로 잘 모셔야지!’ 하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꼭 하나님을 뵙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 후 제가 숙명여중에 재학 중일 때, 어머니와 친분이 있으신 군수 사모님이 저희 집에 찾아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이신 그분은 남산에서 열리는 대부흥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셨는데, 그 집회에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유명한 분이 나오신다며 어머니에게 같이 가 보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그분과 함께 열흘 동안 집회에 계속 참석하시더니, 그 뒤로 한강 모래사장 집회 등 박 장로님이 하시는 집회에 열심히 따라다니셨습니다. 그때가 1955년이었습니다.

혼신을 다하여 예배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뵙고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는 사람들 모습에 ‘아! 이런데도 있구나.’ 하고 생각해

당시 박 장로님께서는 서울 시내의 여러 교회에서도 집회를 하셨는데, 박 장로님이 장로로 재직하시는 창동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셨을 때 저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회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던지 저는 단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 간신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설교 시간에 박 장로님께서 말씀을 하시며 단상을 “탕! 탕!” 하고 세차게 치시면 그때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고, 혼신의 힘을 다 쏟으시며 말씀하시는 모습이 매우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박 장로님의 인도에 따라 찬송을 부르는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이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는 것을 보면서, 저는 ‘아! 이런 데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한참 뒤에 창동교회에 다시 가서 박 장로님의 소식을 물었더니, 박 장로님께서 창동교회의 장로 직을 사임하시고 원효로에 ‘전도관’을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원효로전도관으로 예배를 드리러 다니셨고, 저와 동생들도 어머니를 따라 원효로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원효로제단에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박 장로님께서는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서 발 디딜 틈도 없는 사이를 굉장히 빠르게 지나가시며 사람들의 머리를 ‘탁탁탁탁’ 쳐 주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안수하시면서도 누구 하나 “저 안수 안 받았는데요!” 하고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으니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주일이면 예배실 안에 사람들이 다 들어갈 수가 없어서 제단 주변에 죽 늘어서 있었는데, 박 장로님께서는 예배실 밖에까지 나오셔서 그 사람들에게도 전부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발 디딜 틈 없이 앉은 사람들 사이를 다니시며 일일이 안수하시는데
누구 하나 못 받았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해
예배실 밖으로 나가셔서 예배실 밖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안수해주셔

그렇게 전도관에 계속 다니던 어느 겨울밤이었습니다. 집에서 공부를 하던 저는 문득 ‘지금 제단에서는 한창 예배를 드리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날이 토요일이라 원효로 구제단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철야를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불현듯이 거기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공부하던 책을 덮어 두고 제단으로 달려간 저는 우선 창문을 통해 예배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예배실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서 자리가 전혀 없는 데다가 예배 도중에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저는 전등 빛이 환하게 비치는 창문 옆에 서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꼭 하나같이 박자를 맞춰 손뼉을 치면서 힘차게 찬송을 부를 때, 그 우렁찬 소리에 제 마음까지 벅차 오르는 기분이었습니다. 활짝 핀 사람들의 얼굴이 어찌나 신나고 즐거워 보이는지 그 모습들을 보고만 있어도 그렇게 흐뭇하고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용산소방서 소방망루에서 지켜보다 원효로 3가 전도관에 불기둥이 솟아
화재 진압차 달려온 제복의 소방관 불 난 것이 아니래도 믿지를 않아

예배드리는 모습을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뒤에서 등을 탁 하고 쳤습니다. 깜짝 놀라서 돌아다보니 제복 차림의 남자 분이 저를 보고는 “여기서 불이 났다는데 어디서 불이 났는 줄 아니?”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불 안 났는데요. 예배 보는 사람들만 있구요, 불은 안 났어요.” “아니야. 여기에 불났다는 연락을 받았다니까.” “아니에요. 제가 여기 온 지 30분이 넘었는데 불 안 났어요.” 제가 자꾸 불이 안 났다고 하자 아저씨는 본인이 용산소방서의 소방관이라면서 화재 연락을 받은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는 소방서에 높은 ‘소방망루’가 설치되어 있어서 거기서 소방관들이 24시간 보초를 서며 어디에서 화재가 나는지 감시를 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용산소방서의 소방망루에서 근무하던 소방관이 원효로 3가에 있는 전도관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른다고 하여 용산소방서에서 급히 출동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용산소방서에서 여기까지 가까운 거리여서 소방망루에서 내려다보는 소방관이 잘못 볼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한참 동안 제단 주위를 돌면서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또다시 저에게 와서 정말 불이 안 났냐고 묻기에 진짜로 불이 안 났다고 대답하자 그제야 되돌아서 갔습니다.

그다음 날 저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실 안에는 밤새도록 철야한 사람들이 이미 가득 차 있어서 들어갈 틈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제단 옆의 미나리꽝 주변과 한강 샛강 쪽의 둑에까지 북적대며 모여 있었습니다. 제단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예배를 드렸는데, 그날 저는 스피커와 가까운 자리를 잡지 못해 멀리 떨어지는 바람에 박 장로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난 후에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장로님께서 그러시는데 어젯밤에 제단에 불성신이 내렸대요. 그런데 불이 난 줄 알고 소방관이 왔다 갔다는 거예요.” “제단에 불기둥이 확 내려오니까, 불이 나서 불기둥이 치솟아 오른 줄 알았나 봐요.” 하며 서로들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 어제 소방관 아저씨가 보았다는 불이 바로 불성신이구나!’ 하면서, 제단에 ‘불성신’이 내렸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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