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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봐라 한국 땅에 꼭 ‘동방의 의인’이 나타날 것이다

장정자 권사(1) / 소사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77

저는 1932년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서 4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이 중앙청 옆에서 큰 여관을 운영하셔서 저희 가족은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이신 부모님과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갔습니다. 외할머니(故 김신행 권사)는 남대문교회 전도사였으며 성경을 탐독하셔서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가정 예배를 드릴 때면 외할머니께서 대표 기도를 하셨는데, 항상 기도의 끝에 “동방의 의인을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한번은 제가 “할머니, 동방의 의인이 뭐예요?” 하고 여쭤 봤더니 할머니는 “두고 봐라, 한국 땅에 꼭 동방의 의인이 나타나실 거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실한 교인이시던 외할머니는 한국 땅에 꼭 ‘동방의 의인’이 날거라며
기도할 때마다 항상 `동방의 의인을 만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저희 가족은 원효로로 이사했으며 저는 결혼 후에도 친정과 가까운 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저희 옆집은 여러 가구가 사는 집이었는데, 어느 날 그 집의 한 아주머니가 이웃들에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지금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도원동교회에서 부흥집회를 하신다면서, 그곳에 좋은 향기가 진동하고 뽀얀 이슬비 같은 것이 쏟아지는 등 놀라운 은혜가 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부흥집회마다 열심히 찾아다녔던 저는 그 이야기에 귀가 번쩍 뜨여서 집회에 꼭 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날 저녁 도원동 장로교회에 가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습니다. 저는 앞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 사이를 간신히 뚫고 들어가서 단상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도원동교회가 교회 건물을 짓는 중에 자금이 모자라서 박태선 장로님을 모시고 부흥집회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등단하신 박태선 장로님은 키가 훤칠하신 젊은 신사 분이었으며 찬송을 인도하실 때 환하게 빛나는 얼굴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찬송을 부르는 동안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속 깊이 와 닿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회에 계속 참석하고 싶었지만 그날이 집회 마지막 날이라고 하여 아쉬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1955년 3월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교회나 강당에서만 부흥집회가 열리는 것을 봤던 저는
남산집회장에 쳐있는 큰 천막의 규모와 끝없이 밀려오는 인파에 놀라
박장로님께 은혜를 받고 병이 나았다고 감격해 증거하는 목사도 만나

그로부터 며칠 후 제가 다니던 효동 장로교회 교인들이 이야기하기를, 남산공원에서 박태선 장로님의 부흥집회가 열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도원동교회 집회가 끝난 다음 날부터 남산집회를 시작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때 시내 곳곳에는 집회 포스터가 붙어 있고 박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가 큰 화제가 되어서 장안이 온통 들썩이는 느낌이었습니다. 당시 첫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저는 만삭의 몸으로 남산의 수백 개 돌계단을 올라 집회장에 가 보았습니다.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깔아 놓은 그곳에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교회나 강당에서 부흥집회가 열리는 것만 봤던 저는 남산집회의 규모와 끝없이 밀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박 장로님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어찌 된 일인지 아주 지독하고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그 악취를 견디기가 어려워서 저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어디서 이런 냄새가 나지?’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제 생각에 고약한 무엇이 타거나 썩을 때 나는 냄새 같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런 냄새가 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아서 몹시 의아스러웠습니다. 그렇게 남산집회가 열리는 동안 목사들이 중간 중간 등단하여 찬송을 인도하고 박 장로님께 은혜 받은 체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중에 은혜를 받아 병이 나았다며 감격해하는 목사도 있었습니다. 남산집회가 끝난 후에도 종종 박 장로님의 집회 소식을 들었지만 저는 갓난아이를 돌보느라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도원동장로교회에서 박태선 장로님을 보시고 부흥집회를 열었는데 박장로님은
환하게 빛나는 모습으로 찬송을 인도 찬송 부르는 내내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

그 이듬해인 1956년 5월, 첫아들 세현이가 돌이 되던 때였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열이 올라 동네 병원에 데려갔더니 감기라며 주사와 약을 주었는데, 그 후로도 열이 내리지 않아 사흘 동안을 앓았습니다. 당시 약국을 운영하던 남편은 아이의 상태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며 혹시 소아마비일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했습니다. 남편이 아이를 안고 다리를 흔들자 오른쪽 다리가 아무 힘도 없이 흔들흔들거렸으며, 아이는 그 다리를 질질 끌면서 제대로 기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보니 아이가 정말 소아마비에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아이를 데리고 유명한 소아과 병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부터 병원에 줄을 서며 열심히 치료를 받았지만 아이는 좀체 차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도관 다니는 사촌올케 언니는 매일 찾아와 아버지와 성경토론을 벌여
다니던 감리교회 목사에게 큰 실망한 아버지는 전도관을 선택해

그러던 어느 날 사촌 올케언니가 성경을 가지고 아버님(故 장낙형 집사)을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올케언니는 지금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전도관에 다닌다고 하면서 아버님과 성경 구절을 두고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부터 언니는 매일 오전 10시에 아버님을 찾아와 성경 토론을 했는데, 얼마 후 아버님이 전도관에 한번 가 보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다니던 감리교회에서 목사에게 크게 실망한 뒤로 교회에 가지 않으셨던 아버님은 “전도관에 가 봐서 그곳이 진실하게 믿는다면 다닐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어떤 교회에도 가지 않겠다.”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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