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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니 50년을 하루같이 기쁘게 살아온 세월

주채경 님(3)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62

그 후 1969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축복일이 되어 덕소신앙촌에 가서 제단 주변의 공장 지대를 둘러보게 되었는데, 그때 피아노 공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맑고 영롱한 그 소리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렇게 좋은 피아노가 있었구나. 앞으로 사람들에게 시온 피아노를 알려야겠다.’ 하고 결심한 저는 얼마 후 덕소신앙촌에 입주하여 어떻게 하면 피아노를 팔 수 있을지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앙촌 간장을 구입하는 단골 중에는 국민은행 신촌 지점장 사모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둘째 딸이 이화여대에 다니며 피아노를 배운다고 하기에, 저는 그 집에서 시온 피아노를 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피아노를 사라고 권유하면서 신앙촌에 대해 설명을 했더니, 사모님이 하는 말이 “신앙촌 아줌마, 내가 듣기로 신앙촌에 들어가면 하꼬방에 산대요.” 하며 말을 딱 끊어 버리고 더 이상 어떤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신앙촌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그분이 너무 안타까워서 어떻게 하면 사실을 제대로 알릴 수 있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 집에 갈 일이 있었을 때, 저는 신앙촌 달력을 갖다 드렸습니다. 당시 달력에는 사시사철 꽃이 만발하는 덕소신앙촌의 세련된 주택가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그분은 달력을 보자마자 “어머! 이런 꽃동산이 어디예요!” 하며 탄성을 질렀습니다. 저는 “사모님! 여기가 바로 신앙촌이에요.” 하며 이야기를 시작하여 신앙인들이 근면하게 일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곳이라고 차근차근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여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네요.” 하며 열심히 귀를 기울이더니, “이렇게 좋은 데서 만드는 피아노라면 믿을 만하겠어요.”라고 하면서 선뜻 시온 피아노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피아노를 판매하는 동안 참 재미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종로의 한 고객은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딸에게 외제 피아노를 사 주려고 했는데, 그 아이가 신앙촌 캐러멜과 카스텔라를 무척 좋아하며 “피아노도 신앙촌 것으로 사 주세요.” 하고 매일 조르는 바람에 결국 시온 피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회동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시온 피아노를 들여놨더니 아이들이 다른 피아노는 놔두고 시온 피아노를 치려고 줄을 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고객 집에서는 아들이 바이올린을 켜고 딸이 시온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 집 가족들과 같이 흐뭇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1972년 어느 날, 미국 조지메이슨 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던 남동생 하성이가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몸이 너무 아파서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누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생명물을 제대로 알리며 전도하라고 하셔서, 저는 생명물을 동생에게 보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축복받은 생명물을 정성껏 포장하여 워싱턴에 있는 남동생에게 부쳤는데, 얼마 후 다시 편지가 오기를 “누님이 보내 준 생명물을 한 컵 마시고 나니 몸이 아주 거뜬해져서 학교에 바로 나갔어요.”라고 하여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남동생은 제가 보내 주는 신앙신보를 30년 넘게 읽으면서 영혼의 양식이 된다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저는 소비조합을 하며 서울 지역으로 장사를 다니면서 고향 친구인 김순애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순애는 영등포에서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자궁암 수술을 한 뒤로 수술 부위에 심한 통증이 있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기운 없이 힘겹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순애가 건물 2층에 있는 당구장에 올라가면서 몇 번이나 앉았다 쉬었다 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무척 안쓰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축복 비누를 순애에게 주면서, 영모님께서 강하게 축복하신 비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순애는 축복 비누로 거품을 내어 몸을 씻으면서 ‘하나님! 너무 아파요. 제발 낫게 해 주세요.’ 하며 간절히 기도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온몸에 불덩어리를 덮어씌운 듯 아주 뜨거워지더니 그렇게 아프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순애가 생기 있는 모습으로 시장에 갔더니 순애를 잘 아는 시장 상인들이 “어제까지 앓던 사람이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며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순애는 건강을 되찾아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고, 멀리서나마 영모님께 감사드린다며 항상 고마워했습니다.

그 후 1976년에 기장신앙촌에 입주한 뒤에도 계속 소비조합으로 활동했습니다. 1986년에는 1500명의 시온합창단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게 되어, 합창단원들이 한 달 동안 기장신앙촌에서 합숙하며 연습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합창단의 식사를 준비하는 식당에서 일손이 필요하다고 하여 저는 소비조합을 하는 틈틈이 식당 일을 도왔습니다. 원래 몸이 허약한 편인 제가 그렇게 한 달 동안 일했더니 무리가 되었는지, 팔이 너무 아파서 빈 가방 하나도 들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합숙을 마친 후 하나님께서 식당 직원들과 봉사했던 사람들까지 전부 안찰해 주셔서 저도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안찰을 받은 후부터 팔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져서 전혀 아프지 않았고, 오히려 이전보다 몸이 가뿐하여 더욱 활기차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귀한 축복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당시 합창단원 중에는 제가 전도한 세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신앙촌 제품을 애용하는 고객의 딸들이었는데, 세 자매가 기장신앙촌에서 합숙을 하고 막내딸은 다른 친구들을 전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아이들이 교회와 멀어지면서 20여 년 동안 보지 못했다가 최근 들어 기장신앙촌에 찾아와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어른이 된 세 자매는 신앙촌 할머니가 하나도 안 늙으셨다며 좋아했고 저도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그날 둘째가 “한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은혜와 미소를 주시옵소서.” 하는 우리 기도문 액자를 소중히 가져가는 것을 보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다시금 이 길을 따를 수 있도록 부족하나마 마음과 정성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이 길을 따르며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50년을 하루같이 기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흔이 가까운 지금도 건강하게 지내며 무슨 일에든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부지런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천국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지, 저의 부족한 표현으로 다 나타내지 못할 뿐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는 날까지 감사의 찬송을 부르면서 귀한 구원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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