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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소신앙촌(4) – 생필품에서 제철까지①

전국민의 사랑을 받은 '신앙촌 제품'
발행일 발행호수 2156

하나님께서 소사신앙촌과 덕소 신앙촌을 건설하시자 당시의 한 사회학자는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아니하는 그 가운데서 아름다운 도시를 두 개나 건설하고, 공장들을 일으켜서 수만 신자가 완전 흡수되어 잘 입고, 잘 먹고, 잘 살며 신앙에 전념하는 별천지를 만들어 놓았다.”(전 이화여대 최신덕 교수)

1964년 10월 19일자 신앙신보는 “많은 사람들이 제1, 제2 신앙촌의 웅려(雄麗)함에 찬탄을 하면서도,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은 간과해 버리고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적처럼 신기하게만 생각하는 터에, 온갖 핍박 속에서 이뤄진 땀과 눈물의 진면목을 사회학자 최교수가 정확하게 지적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신앙촌을 둘러 본 유명 인사들의 찬사도 잇달았다.

“나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소망을 보았습니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덕소신앙촌을 보고 감탄한 말이다. 선생은 스페인의 마욜카 심포니(Mallorca Symphony) 상임지휘자로 로마, 빈, 파리, 런던, 동경,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세계 각지를 누비면서도 그 마음은 항상 조국에 있었고 그 관심은 언제나 가난한 동포에게 있었다고 했다.

“나는 놀랐소. 우리 힘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신앙촌을 건설한 것을 보고 눈물이 나왔소. 그리고 감사했소. 고마워요. ‘고마운 일이야.” 전 세계를 여행하는 선생의 가슴에 그네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볼 때마다 뼈저리게 느낀 안타까움은 조국의 ‘못 사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신앙촌을 보고는 “여기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고 했다. (신앙신보 1965. 5. 24.)

`신앙촌 보고 감격`

아름다운 주택과 함께 건설된 덕소신앙촌의 30여 공장에서는 각종 생산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제품들은 ‘신앙촌 제품’이라는 이름으로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앙인의 양심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여 만드는 ‘신앙촌 제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고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신앙촌 제품은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당시에는 생소했던 ‘품질 관리’의 개념으로 생산된 것이었으며, ‘신앙촌 물건’은 곧 ‘좋은 품질’의 대명사로 널리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생산품으로는 메리야스, 양말, 수예, 양재, 편물, 담요, 날염, 타월, 소모방적, 스트레치 등 섬유제품으로부터 간장, 조미료, 제과, 두부, 콜라, 국수 등 식품류와 스테인리스 식기류, 기계, 전기, 염소산칼리, 망간, 비누, 화장품, 비닐 등 없는 것이 없었으며 형광등, 블록, 제강, 내화연와 등의 제품과 피아노, 바이올린까지 생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품을 언제나 최고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신앙촌’이라는 상표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양말이니, 내복, 이불, 제과, 철근 등 생산되는 제품마다 모두 최고였습니다. 없어서 못 팔았으니까요.

소비조합원들이 물건을 가져가려고 새벽부터 서서 기다렸는가 하면, 또 밖의 업자들은 그 업자들대로 소비조합원들이 가져가고 남은 물건을 가져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습니다” (박해정 승사, 신앙신보 1994. 1. 16.)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리 신앙촌 제품은 유난히 광채가 나서 보기만 하면 안 살 수가 없다고들 할 정도였습니다.

한복부의 엑슬란 속치마, 메리야스의 엑슬란 내복, 수예부의 이불 등은 소비조합원이 날마다 줄을 지어 서서 사가야만 했습니다.

그때까지 한국엔 재봉수 제품이 없었고 우리 신앙촌에서 처음 시작했는데 육영수 여사가 대통령과 함께 동남아를 순방할 때 우리 수예부에서 수 치마저고리 12벌을 수놓아 드렸는데 많은 찬사를 받았습니다.” (故 강명수 승사, 신앙신보 1994. 3. 6.)

신앙인들이 왜 생산을 하고 사업을 하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각계 각층의 인사들로부터 신앙촌 생산활동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들은 신앙은 경제와 병행할 때 가장 건전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비판론자의 비판 잠재워

당시 건국대학교의 김기석 교수는 “오늘날 한국 교계가 달러 꽁무니나 따라다니며 신앙적인 면까지 전부 선교사들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무슨 큰소리 할 것이 있느냐”고 경제적인 독립 없이는 신앙적인 독립도 없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였다.

“일전에 모 제당회사를 경영하는 유수한 실업가 한 분이 찾아와 하는 말이, ‘이거 큰일 났습니다. 소사와 덕소의 신앙촌 생산운동이 기성 업체에 일대 위협이 됩니다. 글쎄 ‘신앙촌’ 렛텔을 붙여야만 쪽을 쓰니 가짜 신앙촌 렛텔이라도 붙여야 하겠어요.’ 하면서 비명을 올리더군요.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당신네들은 남겨 먹을 생각만 가지고 물건을 만들고, 신앙촌에서는 있는 힘을 다하여 양심껏 생산을 하니 그렇게 되는 것 아니겠소.’ 라고 충고했지요.”
(신앙신보 1963.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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