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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산 대집회때 쏟아지는 비 맞으면서도 은혜에 열광

곽옥란권사 / 뉴욕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148

저는 1927년 강원도 양구에서 6남매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쌀, 포목 등을 판매하는 큰 상회를 운영하셨기 때문에 저희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스무 살에 결혼하여 춘천에서 살았는데, 6·25 전쟁이 끝나고 이웃 사람의 전도를 받아 춘천 천주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성경공부 많이 한 나는 전도관 사람들과 성경을 토론해
얘기해 보니 그분들 설명이 명확하고 설득력이 있어
전도관에는 이슬과 같은 은혜 내린다는데 한번 가보자 생각

당시 우리나라는 전쟁을 겪은 뒤라 경제 상황이 아주 어려워 외국에서 구호물자가 많이 왔습니다. 하루는 제가 다니는 천주교회로 구호물자가 왔는데, 번듯하고 쓸 만한 물건은 교회의 높은 사람들이 전부 가져가고 교인들에게는 허섭스레기 같은 물건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사람 주라고 나온 구호물자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양심이 있는 보통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을 텐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기 잇속만 차리는 모습에 여간 실망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계기로 천주교회에 더 이상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57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학교 후배인 이은자 씨(現 소사신앙촌 권사)가 저희 집에 와서는 자신이 전도관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도관에 나가 은혜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며 전도를 했는데, 저는 교회가 다 똑같지 전도관이라고 뭐가 다르겠나 하면서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은자 씨가 전도관 교인 한 분과 함께 저희 집에 와서는 성경 토론을 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성경에 관심이 많아 나름대로 성경 공부를 했었는데, 며칠 동안 계속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들의 설명이 더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또 전도관에서는 이슬과 같은 은혜가 내린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 일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토론을 계속할수록 전도관은 무언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전도관 예배에 한번 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때가 12월 겨울이었습니다.
그 주 일요일, 저는 이은자 씨와 함께 춘천전도관 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춘천전도관은 봉의동 산언덕에 천막을 친 곳으로, 땅바닥에는 가마니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 위에 계속 앉아 있으니, 얼었던 바닥이 체온을 받아 녹으면서 가마니가 축축하게 젖고 제 옷까지 젖어 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런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겠지만, 옷이 젖는 것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예배 시간이 참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좋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기쁨이 제 마음속에 가득히 채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온 저는, 전도관 교인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나도 그런 은혜를 받으려면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 매일 새벽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도관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천막 제단 근처에 대지를 마련해 전도관 건물을 신축하게 되었습니다. 목수 기술이 있는 교인은 직접 건설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교인들 모두 제단 짓는 일에 정성과 마음을 모았습니다. 저는 일꾼들의 점심 식사를 맡아서 매일매일 밥과 반찬을 맛있게 준비해 제단 짓는 곳까지 가져갔습니다. 식사를 담은 통을 머리에 이고 갈 때 발걸음은 더없이 가볍고 즐거웠고, 저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기에 다른 어떤 일보다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 1958년 봄, 천막에서 시작한 춘천제단은 드디어 새하얀 외벽의 웅장한 전도관으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소사신앙촌 노구산에서 대집회가 열려 저도 참석을 했습니다. 일주일 정도 집회가 열리는 동안 비가 많이 쏟아져서, 찬송할 때 손뼉을 치면 빗물이 얼굴에 튀기도 했고 옷에는 벌겋게 진흙물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비를 맞으면서도 노구산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자리를 떠날 줄 모르고 집회에 열중했습니다. 집회를 마친 후 강원도 가는 기차를 탔더니 그 칸에 있는 사람들 모두 옷에 벌건 진흙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전도관 식구들이구나 하며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고, 강원도까지 가는 동안 다 함께 찬송을 부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기차가 달려가는 철길 위로 힘찬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때 기억은 지금도 흐뭇하게 떠오르곤 합니다.
그 후 1959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세 살이던 딸 정임이가 집에서 넘어지면서 댓돌에 가슴을 받힌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아이가 끙끙 앓는 소리를 하며 아파하기에 춘천 오내과에 데리고 갔더니, 의사는 엑스레이를 찍어 보고 늑막염이라며 폐에 물이 찼다고 했습니다. 당시는 하나님께서 옥중에 계실 때로, 교인들이 각자 집에 물을 떠 놓으면 영적으로 축복하셔서 생명물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생명물을 축복 솜에 적셔서 아이의 가슴에 대고 계속 찜질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끙끙 앓는 소리를 멈추고 잠을 잘 자더니 다음 날 아침에는 언제 아팠나 할 정도로 활기차게 뛰어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오내과에서 엑스레이를 찍어 봤는데, 의사는 폐에 찼던 물이 없어져 완전히 정상이 되었다며 놀라워했습니다. 그 일뿐 아니라 5남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아프거나 다쳤을 때마다 축복물로 깨끗하게 나았고 그 은혜 속에서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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