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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윤 전직 관장 편 ① 물결치는 파도같이 수많은 사람들 집회에 모여

물결치는 파도같이 수많은 사람들 집회에 모여
발행일 발행호수 2292

1955년 한강모래사장 집회에 모인 수많은 인파.

저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100여리 떨어진 조그마한 촌 소지주의 8남매 중 7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열 살 때 해방이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공산국가를 세운 다음 많은 사람들을 숙청하였습니다. 우선 지주들 둘째로 기독교 신자들 셋째는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지주라는 명목으로 감옥에서 일 년 동안 고초를 겪고 감옥에서 나오신 후 온 식구를 거느리고 1945년에 서울로 피난을 왔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모인 한강모래사장 집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병이 낫는 기사이적을 보고
향취를 맡고 이슬 같은 은혜를 봤다는 얘기 들어

그러나 그후 5년만에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또 식구들은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평택까지 꼬박 걸어서 내려 왔을 때 공산군의 야크비행기들이 평택역을 막 기관총으로 쏘아 여러 사람이 죽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고생 끝에 부산에 도착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9월 28일 수복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또 중공군이 쳐 내려와 UN군과 국군이 퇴각하게 되어 다시 대구로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1951년 1·4 후퇴 때의 일입니다. 이때에 많은 이북 동포들이 공산 치하를 혐오하여 500만 명이라는 피난민이 이남으로 내려왔습니다. 참 지긋지긋한 고생이었습니다. 6·25전쟁을 경험한 저는 공산주의자라면 상대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6·25전쟁 사상자가 300여 만 명이었는데 우리 5천년 역사에 이렇게 많은 숫자가 전쟁으로 희생된 일은 없었습니다.

그 때 저는 대구에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습니다. 열심히 새벽제단에도 나갔고 교회에서는 학생회장으로 학교에서는 종교부장으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제가 다닌 태평로 장로교회는 일제 때 유일하게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자존심이 강한 장로교회였습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용산 장로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일학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제 여동생이 영등포 모래사장에서 박태선 장로님이 부흥회를 하신다며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틀이 지나서 동생이 목이 쉬어서 돌아왔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저도 영등포 모래사장 집회에 가보게 되었습니다. 큰 천막 밖에는 병자들이 즐비하게 누워있고 앉아 있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 저는 집회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한강모래사장 집회를 한다는 벽보를 보게 되었습니다.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이 부흥회를 하신다는 포스터가 왜 그렇게 여러 번 눈에 띄는지 말입니다. 제가 기성교회에 다닐 적에 목사님들의 부흥집회를 빠지지 않고 다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집회 첫날부터 수많은 인파가 몰려와 좌정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치 물결치는 파도와 같았습니다. 서울운동장 버금가는 넓은 천막이었습니다. 박장로님이 단에 오르셔서 천지를 진동하듯 설교 말씀을 하시고 병자들을 일으키시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 때 제 마음이 움직여졌습니다. 나도 은혜를 받아보아야겠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그래서 집회하는 날까지 금식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옆에 앉은 사람들과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향취가 나고 이슬 같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이슬 같은 은혜를 받아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아직도 기도의 상달이 되지 않아서인지 향취는 커녕 이슬 같은 은혜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은혜받고 싶어 금식하고 기도드리며 매일 간구
처음엔 아무 체험도 없다가 집회 마지막날에
뿌연 연기 같은 이슬은혜가 내리는 것을 체험

저는 저 같은 인간은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모양이라고 낙담했습니다. 그런데 집회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밖에는 햇빛이 쨍쨍한데 천막 안에는 연기와 같이 뿌연 것이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이것인가보다 이것이 이슬 같은 은혜인가보다’하고 자문자답하였습니다. 예배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참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집회기간에는 윤치영 장관께서 간증도 하시고 단상 뒤에는 목사분들이 많이 앉아 계셨습니다. 그분들은 안찰도 원하면 받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었더라면 안찰을 받을 수 있을텐데하고 부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기성교회에 다닐 적 부흥사님들의 설교를 많이 들었습니다만 박장로님의 죄를 짜개는 그런 설교는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병자들이 리어카에 실려서 들어오고 미친자들이 기둥에 매어져있고 과거에 보지 못하던 광경이었습니다.
저는 이 집회 기간에 많은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박장로님을 매일 모시고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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