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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윤 전직 관장 편 ③ 천막집회에서 은혜받던 생각하며 개척교회 어려움 이겨

천막집회에서 은혜받던 생각하며 개척교회 어려움 이겨
발행일 발행호수 2296

1955년 천막집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3. 순천, 보성, 온양, 성북 제단에서의 교역생활

순천전도관에서 3개월 후 보성전도관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보성은 하나님께서 한 번 집회하신 적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기성교회 목사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이 하나님께서 순회하실 때 타고 오신 짚차를 옆으로 넘어뜨려 놓을 정도로 강퍅한 곳입니다.

그곳에 부임해 가니 제단도 없고 처음에는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미 작고하신 설 권사님과 열심있는 식구들이 있었기에 조그마한 제단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1년 가까이 시무하는 동안 식구들이 40여 명 정도 늘어났습니다.

온양에서 교역생활을 하는 동안 추운 겨울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집 생각이 날 때면
늘어나는 교인들과 하나님 은혜 생각하며 힘을 내

50여 년 전 우리나라 경제는 참으로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하루 세끼 먹는 집이 많치 않았을 때입니다. 그때 어려움은 교역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저는 식사를 어느 집사님 댁에서 했는데 어려운 가운데서도 정성껏 교역자를 섬겨 주었습니다. 보성은 감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여 점심은 가끔씩 감으로 때우기도 했습니다.

1957년 12월 온양제단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참으로 추운 계절이었습니다. 충청도하면 인심도 좋고 기후도 온화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도 추운지요. 제단은 인가도 아닌 산등성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저녁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밤 1~2시까지는 괜찮았지만 그 이후로는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추워서 앉아서 지낼 때가 많았습니다. 제단에는 아무도 없고 저 혼자만 기거하였는데 이럴 때 가끔씩 집생각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귀신들려 정신이상이 된 사람을 데려왔는데
교인들과 함께 찬송으로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해
병 낫게 한 후에는 기진맥진하여 식사도 못해

저는 부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집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곱게 자랐습니다. ‘별 고생없이 자랐는데 이 무슨 고생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식구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저의 첫 번째 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강 모래사장 집회에서 은혜받은 것을 생각하며 힘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한참 동안 찬송을 하신 후 쉭 하고 축복을 하시면서 “병 나은 사람 일어나세요” 하시면 어떤 날은 수십명씩, 어느 날은 수백명이 일어나서 간증을 하였습니다. 바로 제 앞에 앉았던 사람이 곱추였는데 그분이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우두둑 소리를 내더니 허리가 펴지는 광경을 제가 목격을 하였던 것입니다.
또 한강 집회에서의 이슬같은 은혜 체험과 구제단에서 하나님 주위에 영광이 드리운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체험이 제 앞에 닥친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대구 피난 시절에 기성교회에 열심히 다녔었습니다. 유명하다는 부흥회는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받아들일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도 기성교회는 어느 정도 희미하게나마 하나님께서 연결시켜 주셨던 성신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성교계가 하나님을 배신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아주 그 성신을 거두어 들이신 것입니다.

일년 남짓 온양에서 시무한 후 서울 돈암동(성북제단)제단으로 부임 하였습니다. 식구들도 꽤 많이 모였습니다. 그곳에는 ‘시어머니 권사님’이 계셔서 교역자들의 일거수 일투족 행동을 감찰하고 시정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저도 그 권사님으로 인하여 많은 것을 고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제단에 나오는 젊은 처녀가 한 사람 있었는데 정신이 이상한 환자였습니다. 그 처녀 식구들은 자기 딸을 정상인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난감하여 어찌 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시어머니 권사님’이 “우리 다같이 찬송합시다”하면서 귀신 들린 처녀를 둘러싸고 찬송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동안 찬송을 하여도 그 처녀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 또 무려 3시간동안 찬송을 하여도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처녀가 목소리는 늙은 노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이상하였습니다.

3일째 되는 날 젊은 처녀는 막 울기를 시작하더니 “너희들 나를 이렇게 괴롭히니 난 나갈거야” 하면서 쓰러지더니 거품을 물고 벌렁 누워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죽은 사람처럼 아무 기척도 없었습니다. 혹시나 죽지 않았나 하고 겁이 났습니다. 얼마 후 부시시 일어나 앉더니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너무나 힘들어서 식사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보성, 온양, 성북제단을 거친 저는 3개월 후 1958년 5월 11일 서대문전도관(지금 7중앙)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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