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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교역자의 기본 자세

남삼호 전직 관장(전 중부 총무) ①
발행일 발행호수 2551

퇴직 후 신앙촌에서 생활하고 있는 남삼호 전직 관장

교인들과 둔덕전도관을 짓고 있는 남 관장(가운데)

남삼호 전직 관장(전 중부 총무)은 1969년에 교역자 생활을 시작하여 50년간 교역을 마무리하고 지난 7월에 정년퇴임을 했다. 후배들에게 가장 귀감이 되는 교역자로 손꼽히는 그의 교역 생활 이야기를 실어본다.

어떻게 천부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까?

-1958년, 17세 때 어머니를 따라 사주를 보게 되었는데, 사주쟁이가 제가 20대 젊은 청춘에 죽게 될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다가 이렇게 바보같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찾아서 살려달라고 한번 간구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친구 중에 천부교를 다니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말이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서는 꼽추의 등이 펴지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등 불치병이 낫는 기사 이적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날로 저는 삼천포에 있는 천부교회에 나갔습니다.

교역자 발령은 언제 받았나요?

-천부교에 입교한 후 하나님 설교 말씀은 이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 지 1년 쯤 되었을 때 지리산 산판 봉사대에서 청년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듣고 지원하였습니다. 지리산에서는 힘차게 찬송을 부르며 새벽예배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벌목한 나무가 신앙촌 건설에 쓰인다고 생각하니 산판에서의 일이 정말 보람됐습니다. 그 후 소사신앙촌 건설대에서 주택건설에 참여하다가 1962년에 군입대를 하였습니다. 복무하는 동안 앞으로 인생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65년 제대 후 관장님의 권유로 1967년 11월 20일 삼천포 죽림전도관에 교역자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교역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1969년 11월 29일 거제도 옥동리 둔덕전도관으로 발령받았을 때 일입니다. 그곳은 전기도 전화도 없는 오지 중에 오지였습니다. 경남 충무에서 배를 타고 또 한참 걸어가야 하는 시골이었습니다. 당시 옥동리 주민들은 대부분 기성교회에 다니고 있었고 더구나 두 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전도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지만 동네 주민들에게 먼저 다가가 살갑게 대하고 진심을 보이니 윗동네 주민들 중심으로 25명의 교인과 50명의 주일학생이 전도되었습니다. 교인이 점점 늘어나니 가장 먼저 교회를 새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재정이 빈약한 가운데 교회를 지을 계획을 하니 어렵기도 했지만 꼭 하겠다고 늘 기도드리고 다짐했습니다.

먼저 벽돌을 찍기 위하여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아 트럭 두 대분의 모래를 채취하였습니다. 시멘트는 충무에서 배로 거제도로 가져와 거기서 다시 리어카로 3킬로나 떨어진 곳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오로지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는 각오로 기쁘게 일했습니다. 신앙촌에서 벽돌을 찍는 수동식 기계를 빌려와 청년들과 5인치 벽돌 4천 장을 찍고 공사판을 벌이니 교인뿐 아니라 주민들도 교회 신축에 도움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자발적으로 통나무를 가져와 지붕 부분을 설치해주었습니다. 벽돌로 지어진 교회 건물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무척 좋아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또 남는 벽돌로는 주민들에게 장독대도 설치해주니 주민들이 모두 좋아했습니다.

거제도에서 교역 생활 하면서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니
교인이 점점 늘어 교회 신축까지
감사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교역자가 되신 후 첫 신축이었네요?

-네. 불모지였던 그곳에 가장 멋지고 훌륭한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나니 감사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주일에는 장년예배, 학생예배 등 예배를 여섯 번 드릴 정도로 바빴고 언제나 기쁨이 흘러넘쳤습니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은 초대를 받아 참석하면 교장이 옆자리를 권하며 귀빈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기성교회에서 사주받은 깡패집단이 술을 먹고 찾아와 예배 중에 몽둥이를 들고 난동을 피웠습니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저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교인들은 몸을 피하였습니다. 이들이 물러간 후에 교인들과 함께 192장 ‘늘 울어도 눈물로써~’ 찬송을 부르니 교회 안이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동네 유지(이도조씨)가 구장 집에서 경찰, 교인, 깡패, 주민과 저를 불렀습니다. 국회의원도 출마한 적 있는 이 유지는 “우리 동네에 이런 멋진 건물이 들어서고 발전도 하고 얼마나 영광스런 일이냐, 아이들도 신앙생활을 해서 좋은데, 이런 깡패는 관장님이 주고 싶은 벌을 무엇이든지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에 깡패들은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후 부산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제가 거제도를 떠나던 날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많은 주민들과 심지어 지붕 위에서 일하던 주민들도 손을 흔들고 양동이를 인 아주머니들은 양동이를 내려놓고 떠나는 저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며 석별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거제도에서 교역을 하면서 배운 것은 진실로 불신자에게도 다가서면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심을 실감한 점입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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