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람나무를 따라 신앙의 길을 걷다
신앙의 발자취 ①종교 전향으로부터 온 큰 변화
감람나무 존재를 실감하고
전도와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
1940년에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저는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큰형님(故 임종덕)의 영향으로 가족 모두 안식일교회에 다니던 중, 1957년 여름방학 때 광주에서 기숙 생활을 하다가 집에 돌아온 저는 큰 변화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형님이 전도관으로 전향하면서 저희 집 2층은 전도관 예배실로 사용되고, 아래층은 신앙촌에서 생산되는 간장, 성냥, 양초 등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보성으로 전학하여 저녁마다 반사 공부와 말씀 공부를 병행하면서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자만심은 감람나무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 2층 예배실에서는 하나님을 모신 집회가 세 차례나 열렸습니다. 이 집회들은 저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깊이 실감하게 해주었고, 제 신앙에 새로운 힘을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집이 협소하여 극장이나 향교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는데, 집회가 있기 전에 형님은 마이크와 홍나팔을, 저는 제작한 커다란 마이크 배터리를 메고 동네 곳곳을 돌며 집회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후 박한윤 관장님이 부임하시면서 제단을 짓게 되어 방과 후에 제단 정지 작업을 도왔습니다. 제단이 지어짐과 동시에 이제는 전도를 위해 힘을 쏟아야 했습니다. 주일학생 전도를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동네를 누비며 심방을 했습니다. 찬송가 괘도를 만들고, 반 표지판도 벽에 걸고, 요절을 필사해 공과 책도 만들었습니다. 매주 늘어나는 숫자는 감당 못 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재미있고 신이 났습니다. 어느 사이 저는 과거 기성교회에 젖어 있던 땟물은 다 빠지고 감람나무 하나님의 은혜에 흠뻑 젖어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겨울철 철야 기도를 하는데도 추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온몸이 후끈 달았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 콧물이 마룻바닥을 적셨습니다.
한번은 신앙촌에서 생산되는 몇 가지 제품을 자전거에 싣고 5일 장 세 곳을 돌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회천 5일 장을 다녀오는 중간지점인 99굽이 고갯길에서 자전거 체인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날은 저물어가고 갈 길은 아직 먼데 난감했습니다. 겨우 자전거를 끌며 집에 오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는 것처럼 조금도 힘들지 않고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어린 내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다는 생각에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어린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나는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니 은혜 비를 머금고 고이 자라납니다. 주의 은혜 감사해 나는 무엇 드리리 사랑하는 하나님 나의 향기 받으소서”
1958년에 노구산 집회에 참석했을 때는 두 번의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눈 안찰을 받을 때는 하나님 손이 눈에 닿기만 했는데도, 눈을 찌르는 듯한 아픔이 있었고, 눈 앞에 별이 번쩍번쩍했습니다. 그 후 몸 안찰을 받았을 때는 극심한 통증으로 몸이 활이 되다시피 했지만, 그 후 주교부장 자격으로 안찰을 받을 때는 전과 같은 통증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손으로 죄가 씻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여러 세대가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고 난 후 보성에 남은 저는 제단 신축공사를 총괄하여 아담하고 튼튼한 제단을 완성했습니다. 그 후 보성제단은 60년 전 그때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2017년 여성회 교회로 새단장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1962년 8월 군에 입대하면서 저는 어느 곳이든 제단이 있는 곳으로 배치되기를 기도드렸습니다.
소정의 훈련과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고 전방지역인 전곡에 배치되었는데, 일요일 낮에 제단을 찾으려고 무작정 전곡 시내를 향해 걸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찬송가 ‘영원한 하늘나라 들어가려고’를 부르면서, 손뼉 치며 찬송을 부르는 교회가 어디 있는지 아냐고 물었는데, 운이 좋게도 제단을 찾아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부대가 양평 용문으로 이동해 행정반 서무반장이 되면서 사무실에서 기도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에 큰 지장없이 군 복무를 마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군 제대 후에는 교역자 권유를 받았지만,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것인지 알기에 계속해서 못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젊음을 불태워 일할 곳은 교역자의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소사신앙촌 사진관에서 근무하며 교역자의 길을 걷기 위한 소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