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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자밖에 모르는 그 기쁨은 표현할 길 없어

양금준 승사(1)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113

제가 하나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55년 9월, 인천 동산중학교 집회에서였습니다. 당시 승산 감리교회에 다녔던 저는,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서울 남산에서 집회를 하실 때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의학으로 못 고치는 불치병자들이 그 집회에서 은혜를 받아 깨끗이 나았다는 이야기는, 제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습니다.
당시 결혼한 지 6년이 되었던 저는 그때까지 아이가 없어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큰 걱정을 안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았지만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의사는 기다려 보자는 말만 할 뿐 별다른 처방이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마음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서울에 사시면서 영락교회에 다니셨던 시어머니는 “박 장로님 집회에 가면 병이 낫는다고 하니 너도 거기서 나을지 모른다.”며 인천 집회에 꼭 가 보라고 하셨고, 저 또한 그런 기대를 품고 인천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집회 장소에 도착해 보니 천막을 크게 쳐 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단상과 가까운 앞자리에는 중환자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습니다. 들것에 실려 와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그들은 병이 아주 깊어 보였습니다. 저는 그 환자들 뒤편에 자리를 잡고 제 병을 고쳐 주십사 하는 기도를 계속 드렸습니다.
집회 중 박 장로님께서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하는 찬송을 인도하시는데, 그 가사 하나하나가 제 마음에 너무나 깊이 와 닿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곁에 함께하신다는 느낌이 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찬송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고 한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감리교회에 7년 동안 다녀 봤지만 그토록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수를 하신 후 “병 나은 자는 일어나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방금까지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던 환자들이 기뻐 뛰면서 “저는 무슨 병이 나았습니다!”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방금까지 중환자였던 그들이 멀쩡해진 모습에 저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곧이어 사람들이 줄지어 단상에 올라가 각자 받은 은혜를 이야기했는데, 그중에는 목사들도 있었습니다. 목사들은 환희가 넘치는 얼굴로 자신이 받은 은혜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했고, 앉아 있는 사람들도 손뼉을 치며 좋아하면서 집회장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일주일 정도 열린 집회에 계속 참석하는 동안 제 마음은 너무나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얼마나 기쁘다는 이야기를 해도, 받은 자밖에 모른다는 말 그대로 그 느낌을 다 전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집회에 참석하기 전까지 마음고생하며 살았던 제가, 언제 그랬었나 싶을 정도로 기쁨과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집회에서 받은 은혜가 잊혀지지 않았고 박 장로님을 따르는 것이 참길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당시 저는 감리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속장(기독교 감리회에서 구역별 모임인 속회를 맡아 인도하는 교직) 일까지 보고 있었지만 박 장로님 집회에서 받았던 그 기쁨은 알지도 못하고 들어 보지도 못했던 은혜였습니다. 귀한 은혜를 주시는 분을 만났으니 그분을 꼭 따르겠다고 생각하던 중, 마침 짠지 공장 2층에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인천전도관이 있다기에 그길로 달려가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인천 집회 참석 후 아이를 가진 저는 이듬해 건강한 딸을 낳게 되었고 1남 2녀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저는 은혜 받은 이야기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이전에 다녔던 승산 감리교회의 속장들 집을 찾아다녔습니다. 속장들은 대부분 5∼60대의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로 20대인 제가 대하기에는 어려운 어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은혜 받은 이야기를 시작하니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제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힘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은혜를 입어 죄를 씻어야 하는데, 감리교회에서는 은혜를 전혀 받지 못했다는 제 말에 속장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길로 방향을 올바로 잡아 그 길을 가야 한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그 후 1957년 서울로 이사를 가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용산구 청암동에 있는 이만제단에 다니면서, 영락교회에 다니시던 시어머니를 전도했습니다. 어머니가 이만제단에 다니게 되자 영락교회 목사가 자꾸 저희 집으로 찾아왔는데, 하루는 제가 목사에게 “우리 어머니를 천국에 보내 줄 자신이 있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 자신이 있으시다면 목사님 교회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라고 했지만 목사는 그 자리에서 답을 못하고 피하기만 했습니다. 그 후로 목사가 한두 번 더 찾아왔을 때 제가 똑같이 물어도 목사는 아무런 답을 못하더니, 결국 저희 집에 발길을 끊고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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