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취의 은혜 속에 괴롭던 마음은 참 평안을 찾아
박희애 권사 / 기장신앙촌저는 1933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9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넉넉한 가정 환경에서 엄격하고 근엄하신 아버지와 자상하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유복하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故 장순희 권사)를 따라 어릴 적부터 장로교회에 다녔던 저는 결혼 후 서울 종로에 살면서 창신 장로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55년 11월, 어머니가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인도하시는 광주 공원 집회에 참석하시게 되었습니다. 원래 어머니는 심한 가슴앓이로 고생하시면서 속에 뭉친 것이 치받고 올라오면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셨는데, 놀랍게도 박 장로님 집회에 참석한 후로 그 병이 씻은 듯이 나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장로교회에 가지 않으시고 박 장로님 집회가 열리는 곳마다 열심히 찾아다니셨으며 얼마 후에는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광주전도관에 나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저희 집에 오실 때마다 박 장로님 집회에서 은혜 받은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습니다. 집회에 참석하여 예배드릴 때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아주 좋은 향기를 맡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향기이며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은혜를 받으면 자신의 죄가 소멸되기에 죄가 타는 냄새도 난다고 하시면서, 장로교회에 수십 년 다녔지만 그런 은혜를 가르쳐 준 사람도 없고 받아 본 적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박 장로님께서는 “은혜를 받아 죄를 씻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데, 기성교회는 은혜가 없으니 구원을 줄 수 없다.”라고 강조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기성교회에서는 구원을 줄 수 없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박 장로님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병도 나으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이야기하실 때마다 주의 깊게 들어 보곤 했습니다. 그런 말씀과 체험담을 계속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조금씩 수긍하게 되었고, 장로교회와 점점 멀어져서 나중에는 아예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신문 지상에서 전도관을 비방하는 기사를 보신 후로 어머니가 전도관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말씀에 반대되는 일을 하신 적이 없으셨는데, 전도관에 대해서만은 그 뜻을 꺽지 않으셨습니다. 유순하신 성품의 어머니가 “전도관에 대한 신문 기사는 믿을 수 있는 내용이 못 된단다. 내가 직접 전도관에 다니며 체험하지 않았니.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전도관에 계속 다니겠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실 때 저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전도관에 안 가시면 두 분이 다투실 일도 없고 예전처럼 화목하게 지내실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단호한 결심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 남편은 국민은행에서 근무하면서 바쁜 업무 때문에 식사를 잘 거르기도 하고 퇴근 후에는 회사 동료들과 술을 마시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1967년경 하루는 갑자기 속이 아프다고 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진찰을 받게 되었는데, 위암 말기로 3개월 이상 살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차마 남편에게 암이라는 것을 알리지 못하고 망연자실해 있을 때, 대학생이던 남동생 경서가 저를 찾아와서는“누님, 어머니가 다니시는 전도관에 나가 보시지 그래요.” 하면서, 또 저에게 “매형에게도 전도관에서 안찰을 받아 보라고 하면 어떨까요?”라고 권유했습니다.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막막한 상황에서, 저는 무엇이든 희망이 될 만한 것을 다 해 보고 싶었기에 동생이 권유하는 대로 전도관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미아리 2중앙 전도관에서 처음으로 새벽예배를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관장님의 인도에 따라 “성신 나를 오라 하네~”하는 찬송을 부를 때 저도 모르는 사이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성신 나를 오라 하네. 성신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가려네~” 성신께서 약하디약한 저와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소리 없는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렇게 한참 찬송을 부르던 중에 어디선가 꽃향기같이 아주 향긋한 냄새가 진하게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예배실에 교인들만 빼곡히 앉아 있을 뿐 그런 향기가 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너무나 좋은 냄새가 계속해서 진동했습니다. 그 향기 속에서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던 제 마음이 어느새 가벼워지고, 거친 풍파가 지난 후에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과 같이 고요함과 평안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예배 때는 머리카락이 타는 듯한 역겨운 누린내가 코를 찔러서 도대체 어디서 이런 냄새가 나는지 의아할 뿐이었습니다. 순간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던 죄 타는 냄새가 바로 이 냄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주일마다 서울 지역의 중앙 전도관을 순회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서울 2중앙에도 오셔서 예배를 인도하셨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실 때, 저는 그 말씀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은혜를 받고 보니 누구를 조금만 미워하는 마음을 먹어도 양심에 거리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양심에 어긋나는 생각이 잠깐 스쳐 갔을 때, 그 죄를 눈물로 고하고 회개하면서 성신의 은혜로 씻어 주시기를 진심으로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저는 어머니가 심한 반대 속에서도 전도관에 계속 다니시는 이유를 마음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교회에 다니는 것은 교양을 쌓거나 사람들과 친분을 맺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다. 박 장로님께서 이토록 분명하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데 어떻게 다른 길을 갈 수가 있겠나. 진정으로 구원을 원한다면 누가 뭐라 해도 이 길을 따를 수밖에 없겠구나.’ 그리고 아버지가 전도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시지 않고 비방하는 말만 들으시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아버지도 참길을 깨닫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리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2중앙 전도관에 다니면서 하나님께 안찰을 받은 후로 눈에 띄게 병세가 나아졌습니다. “하루빨리 은행을 그만두고 전도사 수강을 받아서 전도사가 되어야겠다.”라며 의욕을 보였는데, 남편의 고향인 충남 대천에 내려가서 전도관과 잠시 멀어졌을 때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더니 거기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차차 회복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게 되어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 고비를 넘기고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남편이 숨을 거둔 후 저희 집에 대천전도관 전도사님을 비롯해 전도사님 여러 분이 오셔서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생명물로 깨끗이 씻긴 시신은 얼굴이 환하게 피어나고 입가에 방긋이 미소를 머금은 고운 모습이었습니다. 전도사님들도 그 모습을 보고는 “시신이 웃어요, 웃어.”하고 서로들 이야기했습니다. 예배를 드린 후부터 집 안에 향긋한 꽃 냄새 같은 향취가 계속해서 진동했으며, 다시 모여 찬송을 불렀을 때는 아주 고소한 냄새가 참기름을 뿌린 것보다 더욱 진하게 맡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