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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기쁨을 알았으니 이보다 복된 일이 없어

김배숙 승사/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37

1960년 소사신앙촌 오만제단 예배 광경(위) 1957년 4월 30일 이만제단 개관집회 때 내린 이슬성신

유난히 달이 밝은 여름밤이었습니다. 저는 세상을 떠난 친구 생각에 잠을 못 이뤘습니다. 1·4 후퇴 때 피난 와서 알게 된 친구였는데, 이십 대 젊은 나이에 급체로 며칠 앓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덧없고 허무한 것이 인생인가 하며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온 종일 고단하게 일하고 잠자리에 누우면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습니다. 밖에 나와 달을 올려다보며 ‘이 세상에 신이 계신가요? 신이 계시다면 저를 이끌어 주세요.’ 하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신을 찾아 의지하고 싶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였고 집안 환경 또한 풍족했습니다. 무역업을 하시는 아버지가 대대손손 번창하라고 평원군에 크게 지은 기와집에서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평양의 명문인 서문여고에 다니며 세상 어려운 줄 몰랐지만 2학년 때 해방되고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부자들의 재산을 뺏고 시골로 강제 이주 시키는 정책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충남 계룡산 근처로 피난 온 후 직조 기술을 배워서 온 가족이 직조 공장에 매달렸습니다. 난생 처음 고생하며 예전 생활이 얼마나 행복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나는 그것을 몰랐구나, 행복은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달렸구나 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갖고자 애썼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친구를 떠올리며
인생의 허무함과 덧없음에 괴로워 해
부족함 없던 집안도 고초를 겪으면서
신을 찾아 의지하고 싶은 마음 생겨

특히 친구가 죽은 뒤로 신을 찾아 의지하고 싶어서 불경을 사다 읽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기뻐질까 하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거기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성경을 탐독하고 집과 가까운 장로교회에 다녔습니다. 공장 하느라 바빠서 교회 갈 시간이 없었지만 아버지는 제 고민을 짐작하셨는지 종교를 갖는 것을 적극 도와주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에 나가 보니 교인들이 신에 대한 이야기보다 친목회에 관심이 많아 보였습니다. 예배 마치자마자 누가 한턱을 낸다, 어디 유원지에 간다 하며 떠들썩한 것이 영 내키지 않아서 안 갔더니 목사와 교인들이 줄줄이 찾아와 할 수 없이 다시 나갔습니다. 차츰 교회 친구가 생기고 성가대와 반사 일에 재미를 붙이면서 계속 다니게 됐습니다.

가족들이 하는 직조 공장이 잘되는가 싶더니 새로 시작한 사업이 망하고 다시 빈손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큰동생이 서울법대에 입학하고 아래 동생들도 고등학교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저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기술을 배워서 미싱 자수 일을 했습니다.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일요일이면 장로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위로와 평안을 구했지만 신의 존재는 막연하고 멀기만 했습니다.

고달픈 삶 위로 받고 싶어 교회에 나갔지만 신의 존재 막연하게 느껴져
전도관에서 하나님께 안찰 받고 속이 시원해지면서 은혜를 갈망해
예배 시간에 향취 은혜가 내려 형용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맡아지고
입에서 찬송이 끊이지 않고 가슴에서 기쁨이 샘솟아 자꾸 웃게 돼
그토록 바라던 신의 존재가 곁에서 함께하는 듯 가깝게 느껴져

그때 저는 고모 집에서 지냈는데 일요일이면 먼 친척 되는 분이 오셔서 전도관에 같이 가자 하셨습니다. 이단인 전도관 교인과는 대화도 일절 금하라는 목사 말이 생각나 난감했는데, 연세 지긋한 어른이 스무 번 넘게 찾아오시니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친척 어른은 전도관 교인이 모여 사는 소사신앙촌으로 안내해 주셨습니다. 신앙촌의 주택이며 공장 지대를 구경하고 오만제단 예배에 참석했을 때 ‘여기가 이단이라는데…….’ 하며 이상한 점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예배에 열중하는 모습이 오히려 인상적이어서 더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후 6개월 동안 일요일 오전에는 장로교회에 가고 오후에는 친척을 따라 마포 이만제단에 갔습니다. 박태선 장로님의 설교 말씀을 들어 보니 전도관에 은혜가 내린다고 하기에 교인들에게 어떤 은혜를 받으셨냐고 물어봤습니다. 다들 이슬은혜를 봤다, 불성신을 받았다, 향취를 맡았다 하며 체험이 생생하고 놀라웠습니다. 그 즈음 예배시간이었습니다. 힘차게 손뼉 치며 찬송을 부를 때 뽀얀 안개 같은 것이 사람들 머리 위로 내리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굵은 기둥 모양으로 쏟아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내렸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안개처럼 뽀얗게 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저는 각자 은혜 받는 정도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으면 어떨까 하고 궁금하던 차에 박태선 장로님께 안찰을 받게 됐습니다.

전도관은 이단이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친척 어른의 권유로 예배 따라가게 돼
전도관 교인들은 이슬은혜, 향취 등
은혜를 체험했다며 생생하게 증언해

이만제단 예배를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한 사람씩 안찰을 받았습니다. 제 차례가 됐을 때 박 장로님께서는 제가 고집이 센 것을 말씀하시며 배에 손을 살짝 얹으셨는데 얼마나 아픈지 고통을 참기 어려웠습니다. 아픔이 차차 물러가고 배가 시원해지자 손을 떼시고 “마음속 기쁨이 귀한 은혜지요.” 하셨습니다. 안찰 받고 밖으로 나왔을 때 가슴이 어찌나 시원한지 ‘우리나라 말에 속 시원하다고 하는데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심장에서 기쁨이 샘솟는 느낌을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속 기쁨이 귀한 은혜라 하셨던 박 장로님 말씀이 떠올라 “바로 이거구나!” 하며 무릎을 쳤습니다. 안찰 받고 달라진 점은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도, 명예를 가진 사람도, 세상 권세를 가진 사람도 부럽지 않았고 다만 한 가지 부러운 것은 은혜를 많이 받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직접 체험하고 보니 무엇보다 은혜 받기를 갈망하게 됐습니다.

예배시간에 뽀얀 안개 같은 것이
사람들 머리 위로 내리는데 굵은 기둥처럼
내리거나 실오라기처럼 내려서
각자 은혜 받는 정도 다르다는 생각 들어

다음 날부터 집과 가까운 종로 을구 전도관으로 새벽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종종 향취 은혜가 내려 형용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맡아졌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집에 돌아올 때면 몸과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는 동안 입에서 찬송이 끊이지 않았고 가슴에서 기쁨이 샘솟아 자꾸 웃게 되었습니다. 그때 많이 불렀던 찬송가대로 하나님 함께하시면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신의 존재가 곁에서 함께하는 듯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 후 시작한 한복 가게가 잘되면서 생활이 차츰 안정되었습니다. 여자 직원 네 명을 두고 한복을 만들었는데 일요일이면 다 같이 이만제단에 가서 예배드렸습니다. 1962년 덕소신앙촌이 건설되자 직원들이 입촌하기를 원해 모두 덕소신앙촌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한복 가게를 하면서도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신앙촌에서 만드는 여러 가지 좋은 제품을 판매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되어 아현동 시장에 신앙촌상회를 마련해 소비조합을 시작했습니다. 신앙촌 물건을 찾는 사람이 많아 바쁘게 뛰어다니며 판매할 때 참 기쁘고 보람되었습니다. 소비조합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환하게 웃는 사진을 볼 때면 ‘그 시절이 내 보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아버지는 저와 같이 천부교회에 다니지는 않으셨지만 제가 신앙생활 하는 것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1982년 아버지가 72세를 일기로 운명하셨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전화하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큰동생이 목사를 데려와 임종예배를 봤다 하셨습니다. 큰동생은 새문안교회 장로였고 큰올케도 독실한 장로교인이었습니다. 특히 큰올케는 교인들과 같이 교도소에 가서 봉사하고 전도할 정도로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천부교회 식으로 입관하면 마지막에 편안히 가실 텐데요, 천부교회 식으로 하면 안 될까요?” 하고 말씀드리니 상주(喪主)인 큰동생에게 물어보겠다 하셨습니다. 다행히 큰동생은 아버지가 생전에 누님 뜻을 존중하셨으니 장례식도 누님 뜻대로 하겠다 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축복비누로 씻기자
굳었던 몸이 노긋노긋 부드러워지고
피부는 뽀얗게 피고 입술은 선홍빛 돼
귀한 은혜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

서울 충무로와 을지로, 동숭동 천부교회 관장님들이 교인들과 함께 입관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칠성판 위에 누워 계셨는데 일곱 마디를 묶고 턱을 괴어 놓은 모습이었습니다. 돌아가시고 나면 턱이 벌어지고 뻣뻣하게 굳기 때문에 그렇게 해 놓은 것이라 했습니다. 아버지를 칠성판에서 내릴 때 보니 온몸이 굳어 있어서 머리와 발을 들자 통나무처럼 일자로 들렸습니다. 교인들이 힘차게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관장님들이 하나님 축복하신 비누로 아버지를 씻겨 드렸고 동생 한 명이 계속 수돗물을 길어다 줬습니다.

다 씻긴 후 수의를 입힐 때 봤더니 놀랍게도 아버지를 앉혀 놓고 수의를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어느새 노긋노긋 부드러워져서 살아 계신 분 같았습니다. 입관하기 위해 아버지를 들자 아까와는 달리 허리가 축 늘어져서 여러 명이 받쳐 드렸습니다. 짙은 나무색을 띠던 피부색은 뽀얗고 환하게 피었고, 주글주글하던 입술도 주름이 다 펴지고 선홍색을 띠어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습니다.

큰올케는 “친정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왜 그리 무서운지 한동안 집밖으로 나가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하나도 안 무섭네요.” 했습니다. 성결교회 다니는 막내 여동생도 아버지 곁에 계속 있고 싶다 했습니다. 교인들이 밤새우며 관에 덮을 하얀 꽃을 만들어 주자 막내 여동생은 그 꽃을 관 위에 장식했습니다. 관장님이 하나님 은혜로 아버지가 아름답고 환하게 핀 것이며 아버지 곁에서 우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 하시니 식구들은 울지 않고 다들 편안한 모습이었습니다. 조문객들은 다른 장례식과 달리 집안 분위기가 밝고 편안하다 했습니다. 아버지가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셨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에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셔서 마음 깊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1992년 기장신앙촌에 들어와 한복공장장으로 9년 동안 일했습니다. 공장장을 맡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 온몸이 시원해지고 강하게 진동하는 향취를 맡으며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신앙촌의 젊은 입사생들과 일하면서 즐거운 일도 많았고, 고객들이 한복을 입어 보고 좋아할 때는 참 보람되었습니다. 지금은 일선에서 은퇴해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내가 어떻게 이 복을 받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슬픔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허락하시는 은혜로 기쁨을 알았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귀한 은혜 주시는 길을 가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죄를 멀리하며 맑고 아름답게 살아서 그 세계에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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