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위기가 올 때마다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뉴욕교회 안음전 승사안음전 승사
제가 처음 하나님을 따라 나오게 된 동기는 잊을 수 없는 감사한 기억 때문입니다.
1950년 당시 저희 가족은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살고 있었고 남편은 트럭 2대에 직원 4명을 두고 자그마한 운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6․25 전쟁이 발발했고 저희 가족은 일가친척이 있는 양평에 얼마 동안 피신해 있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살아보려던 중에, 또다시 인민군이 내려온다고 하여 주변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습니다. 이른바 1․4 후퇴 때인데, 저희도 뒤늦게 짐을 꾸려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노량진 쪽에 다다르니, 철로에 기다란 화물 열차가 보였습니다. 지붕이 없고 옆 둘레만 나무 막대기로 낮게 쳐 있는 기차 위로 많은 사람들이 너나없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왜 기차를 타느냐고 물으니,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저희 가족도 억지로 자리를 마련하여 짐과 리어카를 싣고 기차 바닥에 올라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국군들이 와서 방공호를 파야 한다며 남편을 기차 밖으로 데려가고 저와 아이들은 기차에 남아 있었는데, 얼마 후 키가 크고 귀하게 생기신 신사분이 저를 보고 “아기 어머니! 아기 어머니!” 하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난리통이라 짐을 동여맸거나 이고 지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뿐인데, 그분은 어디서 오셨는지 파릇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밝은색 춘추복 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계셨습니다. 제가 왜 그러시냐고 하니, 그분은 저에게 “기차에 있지 말고 내려오세요”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신데 그러세요? 이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야 살 수 있다고 해서 겨우 뚫고 들어온 건데 내려가면 어떻게 해요” 하며 내려갈 수 없다고 하니, 그분은 다시 “제 말을 좀 들으세요. 이 기차 타면 안 됩니다. 안 돼요” 하고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기차 위로 올라오시더니, 저희 아이들 넷과 짐, 리어카도 기차 밖으로 내려 주신 다음 리어카에 다시 그 짐을 실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아이들 아버지는 어디 갔냐고 물으시기에, 방공호 파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남편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그쪽으로 가셔서 국군한테 양해를 구하고는 남편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짐이 실려 있는 저희 리어카를 밀어 철길을 건너게 해 주신 후 남편에게 하시는 말씀이, 군용도로를 따라 부산으로 가지 말고 이대로 시골길로 들어가 피신했다가 전쟁이 잠잠해지면 다시 올라오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렇게 그분과 헤어지고 걷다가 바로 뒤를 돌아다보았는데, 그새 어디로 가셨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날은 금방 어두워져서 저희는 얼마 가지 못하고 하룻밤 머물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시골길에 빈 돼지우리 같은 곳이 보여 일단 거기로 들어갔습니다. 볏짚이 잔뜩 쌓여 있기에 그걸 깔고 그 위에 이불을 편 다음 지친 몸을 쉬었습니다. 몇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멀리서 폭격 소리가 들렸고 얼마 있다가 마을 방송이 들려왔습니다. 그 방송 내용은, 몇 시간 전 저희가 타려고 했던 그 기차가 폭격을 맞아 기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몰살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너무나 놀라 밖으로 나와 걸어온 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 불에 타고 있는 기차가 보였습니다. 그 순간 기차에서 내리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셨던 그 신사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이 우리 식구를 살려 주셨구나!’ 하는 생각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6·25 전쟁시 부산행 기차에 힘겹게 탔으나 어느 신사분의 권유로
다시 내려, 가족이 폭격을 피하고 살아남아
그날 이후, 저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일단 피난민 행렬을 좇아갔습니다. 그렇게 관악산을 넘어가기 위해 꼭대기로 난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아이를 업고 리어카를 밀고 올라가는 도중 너무 고단해서 잠깐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제 눈앞에 저희 가족을 살려 주셨던 그 신사분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이 자리에 있지 말고 옆자리로 비키세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놀라 눈을 뜨고 남편에게 얘기하며 옆자리로 옮기자고 하니, 남편은 지금 자리가 좋은데 괜한 소리를 한다며 핀잔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하면서 아이들에게 리어카를 밀라고 하여 조금 낮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저희 식구가 자리를 비키자, 그 자리로 다른 가족이 얼른 들어와서 걸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군인 차가 갑자기 그쪽으로 들이밀어 그 가족이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피난민 행렬로 복잡한 상황 속에서 군인 차가 운전을 잘못하여 그 가족을 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저희 가족이 걷고 있던 곳이었는데, 생각만 해도 아찔했습니다. 이처럼 저희 가족은 또 한 번 그 신사분의 도움으로 큰 위기에서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피난길에서도 옆자리로 비키라는 말씀에 따라
자리를 옮긴 덕분에 군용차 사고를 면해
그 후 저희 식구는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 정착하게 되었고, 남편은 사진관을 하고 저는 옷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저는 전쟁 때 두 번이나 저희 식구를 살려 주셨던 그 신사분을 다시 한번 만나 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었는데, 어디 가서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신사분이 혹시 교회에 다니는 분이 아닐지 생각되어, 여러 동네로 장사를 다니면서 교회가 있으면 예배 시간에 참석하여 혹시 그분이 계실까 찾아보곤 했습니다. 또 저는 남양면에 있는 감리교회에 열심히 나가면서 부흥회라면 극성스럽다고 할 정도로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부흥회가 열리면 교회 사람들은 곧잘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5년 3월경 어느 날이었습니다. 늦은 밤에 교회 속장이 찾아와,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갔다가 남산에서 집회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참석했다”고 하였습니다. 남산 집회에 가니 깨끗하고 단정한 차림의 젊은 신사분이 찬송 인도를 하는데, 예배 중에 안개 같은 것이 내리고 향취가 진동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였습니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남산 꼭대기에 집회 장소가 있다면서 집회가 끝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저는 집회에 갈 생각에 밤잠을 설쳤고, 생후 20일 된 아기를 업고 첫차에 올라 서울로 향했습니다. 몇 시간 후 서울에 도착하여 남산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디서 나는 것인지 기가 막히게 좋은 냄새가 맡아졌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회장 안으로 들어가는데도 그 좋은 냄새가 계속해서 쏟아부어졌습니다. 집회장 바닥에는 가마니가 깔려 있고 그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비좁게 앉아 있는데, 병자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앉을 자리를 찾는 중에 앞쪽에서 친언니의 아들이 저를 발견하였고, 언니 둘은 안 그래도 “음전이가 부흥회에 잘 다니니까 여기도 알면 올 텐데” 하는 대화를 했다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 한 남자분이 단상으로 걸어 나오셨습니다. 이제 예배가 시작되나 보다 생각하고 그분을 쳐다보았는데, 그 얼굴을 보고 너무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쟁 통에 저희 가족 모두를 살려 주신 신사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집회를 인도하시는 박태선 장로님이셨습니다. 제가 그토록 찾던 분을 뵙게 되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찬송가 418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찬송을 인도하시는데 사람들이 손뼉을 치면서 찬송을 부르니 저도 따라서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마음이 너무나 기쁘고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향기로운 냄새가 계속해서 맡아지면서 온몸이 너무나도 시원했습니다.
남산집회에서 그토록 찾던 하나님을 뵙고 따르게 돼
하나님 은혜로 지금까지 이끌어 주심에 무한한 감사드려
저는 이렇게 남산 집회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 뵙고 그때부터 하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남산 집회를 마친 후, 저는 원효로에 사는 언니 집에 며칠 머무르며 언니들을 따라 새벽예배를 다녔습니다. 당시 저의 아들 둘이 학교 공부 때문에 서울에서 자취하고 있어 서울에 올라올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언니들과 함께 원효로에 예배드리러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다니던 교회에는 나가지 않으니 그 교회의 목사, 장로, 권사들이 몰려와 야단이 났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은 자꾸 원효로로 향하여 서울에 더 자주 가게 되었고, 이만제단이 지어진 후에는 이만제단으로 다녔습니다.
몇 년 뒤, 남양면에 교인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전도관 전도사님 한 분이 저희 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부터 빈방을 하나 얻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전도사님을 통해 제단을 지으라고 슬레이트와 시멘트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단 지을 터가 없어 안타까운 마음에 매일 새벽예배 때마다 눈물로써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그렇게 고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믿지 않던 남편이 선뜻 땅을 구해 주었고, 전도사님과 안양제단 관장님께서 오셔서 공사를 시작해 주셨습니다. 공사 중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사히 제단을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남양제단에 다니다가 1982년 미국 뉴욕에 가 있던 큰딸의 초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민 가기 전 관장님께 여쭈어보니 뉴욕에도 천부교회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이민을 간 직후 제단을 찾아다녔지만 찾지를 못하였습니다. 석 달 정도 그렇게 답답하게 지내던 중, 이웃분을 통해 천부교회에 다니는 분을 알게 되어 그때부터 뉴욕제단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뉴욕제단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시신이 아름답게 피어가는 것을 직접 보고 체험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저희 제단 이순이 승사님의 남동생(이정희)으로, 1993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의 일입니다.
고인은 생전에 제단에 열심히 다니시던 분이었습니다. 고인이 장례식장에 안치된 그날 저녁 교인들과 함께 입관예배를 드렸고, 생전보다 더 뽀얗고 고와진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입술은 빨갛고, 손톱에는 봉숭아 물을 들인 것처럼 고운 빛깔로 발그스름하였습니다. 앞으로 두 손이 모아져 있었는데, 손 안에 전구를 쥐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 사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보았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또 1999년 6월 뉴욕제단 이유순 승사님이 운명하셨을 때도, 검버섯이 많던 생전 모습과는 다르게 얼굴이 뽀얗게 피고, 살짝 웃는 모습으로 편안하게 가신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보다는 제 사정과 형편에 맞추어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한 저에게 그 귀한 은혜를 부어 주시며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2001년 9월 23, 30일 신앙신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