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 행복을 누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유효순 승사(2) / 기장신앙촌건설대에서 일을 배우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 후에는 원하는 사람만 작업하러 나오라고 했는데, 저는 몹시 피곤해서 그만 들어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식사하는 동안 피곤이 점점 사라지더니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한 것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이 가뿐하고 기운이 솟아올라 다시 현장에 나가 신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저녁 식사 시간에 하나님께서 건설대 식당을 향해 한참 동안 축복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주셔서 그렇게 몸이 가벼웠구나!’ 하며 마음 깊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건설대에서 일하며 다치거나 아플 때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은 일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못에 발이 심하게 찔려서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할 때 친구 부축을 받고 하나님께 갔는데 “쉭! 쉭!” 하시며 축복해 주시자마자 곧바로 지혈이 되고 아프지 않아서 그길로 혼자 뛰어 온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국으로 순회 집회를 다니시는 중에도 건설대에 자주 오셔서 안수와 안찰로 힘을 주셨고, 반 별로 생명물을 축복해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는 신앙촌에 들어간 후로 늘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 싱글벙글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웃에 사시는 어른들은 저를 보시고 “너는 언제 봐도 웃는구나.” “신앙촌이 그렇게 좋아?” 하며 같이 웃곤 하셨습니다. 건설대에서 땀 흘려 일할 때도, 제단에서 찬송을 부를 때도, 신앙촌 거리를 걸을 때도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샘솟는 것 같았습니다. ‘찬송가 가사에 있는 것처럼 주 안에 행복을 누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설대 일로 몸이 피곤해 쉬려는데
피곤이 점점 사라지고 개운해져
하나님께서 건설대 식당을 향해
한참 동안 축복해 주심을 알게 돼
신앙촌에서 기쁘게 생활하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이 되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국에 전도관이 세워지고 신앙촌까지 건설돼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몰려오자 특정 종교계와 그들을 등에 업은 일부 정치인들이 합세해 아무런 죄도 없이 옥고를 치르시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루는 새벽예배에 가려고 준비하는데 “쉭! 쉭!” 축복하시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 문을 열고 나가 봤지만 아무도 없었고 집 안에는 어느새 향취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축복해 주시는 소리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했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원해지고 몸이 얼마나 가벼운지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그 일을 잊어버리고 지냈는데 하나님께서 영어에서 돌아오셔서 예배를 인도하실 때 “그동안 내가 축복해 준 사람들이 있다.” 하시며 축복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손들어 보라 하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축복 소리가 생생히 들렸던 일이 떠올라 ‘은혜를 주셨구나!’ 하며 손을 번쩍 들고 보니 여러 사람이 손을 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어에 계실 때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됐습니다.
새벽예배를 가려고 준비하는 중에 `쉭! 쉭!` 축복해주시는 소리가 크게 들려
어느새 향취가 진동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이 시원하고 가벼워져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며 은혜를 내려주심을 절실히 느끼게 돼
1962년 두 번째 신앙촌인 덕소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저도 덕소에 입주해 몇 년 동안 지냈습니다. 그 후 스물일곱 살에 결혼하면서 서울로 나오게 되었고 경기도 파주로 이사하고부터는 파주전도관에 다녔습니다. 그때 서울에 살던 남동생은 천호동제단에 다니며 아버지를 모셨는데 1977년 아버지가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는 제단에 다니지 않으셨지만 남동생과 저는 입관예배를 드리며 전도관식으로 장례를 치르자고 했습니다.
입관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생명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아버지 입에 넣어 드렸더니 한 방울도 흘러나오는 것 없이 다 들어갔습니다. 또 생명물로 깨끗이 닦아 드리자 주름살이 다 사라지고 얼마나 곱게 피었는지 청년처럼 젊어 보였습니다. 특히 원래 까무잡잡했던 피부가 뽀얗고 환하게 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모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너희 아버지에게 화장을 해 드린 거냐?” 하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천호동제단 관장님과 교인들이 오셔서 입관예배를 드린 후에는 더욱 환하게 피었고, 온몸이 살아 계신 분처럼 노긋노긋 부드러워서 앉혀 놓고 수의를 입혀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하나님을 모르셨지만 하나님께서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셔서 아름답고 편안한 모습으로 가셨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명물로 닦자
주름살이 사라지고 뽀얗고 곱게 피어
입관 예배 드리니 몸이 노긋노긋해져
앉혀 놓고 수의를 입혀 드릴 정도
그즈음 저는 파주에서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앙촌 담요 인기가 얼마나 좋던지 물건을 갖다 놓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이 팔렸습니다. 신앙촌 물건을 찾는 사람들이 많으니 고객을 만나다 보면 어느새 하루해가 저물었고,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바빴습니다. 소비조합을 열심히 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족해져서 딸아이 둘을 대학교에 보내고 부족함 없이 뒷바라지할 수 있었습니다.
소비조합을 하는 동안 저는 항상 마음속으로 신앙촌을 그리워했습니다. 매일 기도드릴 때마다 ‘하나님! 저도 신앙촌에서 살게 해 주세요.’ 하는 말로 끝을 맺었는데, 1999년 드디어 기장신앙촌에 입주하게 됐을 때는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스무 살에 소사신앙촌에 들어가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때처럼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저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때면 ‘하나님을 뵙고 참 행복하게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를 잃은 후로 춥고 외로웠던 제 마음을 포근히 감싸 주셨던 은혜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주시는 은혜 잘 간직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그보다 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이 있을까 싶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저를 이 길로 불러 주신 사랑에 감사드리며 하루하루 그 뜻대로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유효순 승사님 신앙체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