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가지요’ 하셨던 말씀 떠올라
이만화 권사(2) / 홍제교회그 후 1960년 12월에 동아일보에서 하나님 은혜가 찍힌 사진이 조작됐다는 터무니없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전부터 비방 기사를 계속 내던 동아일보가 급기야 이슬성신 사진이 조작됐다고 허위 기사까지 쓰니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교인들이 항의하는 뜻으로 동아일보사 앞에 모여 구호를 외쳤는데, 최루탄을 쏘아서 눈을 뜰 수 없는 와중에 차에 실려 동대문 경찰서로 가게 됐습니다.
이슬 은혜가 찍힌 사진 조작됐다고
허위 기사를 쓴 동아일보
억울하고 분하지만 은혜는 변함없는
사실이기에 꿋꿋하게 갈 것을 다짐
경찰서에서 조사 받을 때 우리를 두 명씩 앉혀 놓고 “이슬은혜가 무엇인가?” “박태선 장로가 이슬은혜를 내리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저와 같이 앉아 있던 분이 “이슬은혜는 하나님의 신이며 우리 죄를 씻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저도 직접 보고 분명하게 체험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에게는 “박태선 장로가 감람나무인가?” 하고 물어서 호세아 14장에 이슬은혜를 내리시는 분이 감람나무라고 기록돼 있고 박태선 장로님께서 그 은혜를 내리시기 때문에 감람나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대답을 기록하던 경찰관이 “전도관 신도들은 어떻게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똑같은 말을 합니까?”라고 해서 저는 “이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100만 명이 넘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체험한 사실 그대로 거짓 없이 말하니 똑같은 말을 할수밖에요.”라고 했습니다. 또 “은혜가 내리는 것도 사실이고 사진에 찍힌 것도 사실인데 이것을 두고 거짓이라고 하니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하고 되묻자 경찰관은 더 이상 질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동아일보사 앞을 지나면 그때 일이 떠오르곤 합니다. 분명한 사실을 거짓으로 덮어씌워 억울하고 분했던 심정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주시는 은혜는 변함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누가 뭐라 해도 꿋꿋하게 이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이슬성신 사진이 조작됐다고 허위 기사 쓴 동아일보사 앞에서 항의했을 때
경찰관에게 “은혜가 내리는 것도 사실이고 사진에 찍힌 것도 사실인데 이것을 두고
거짓이라고 하니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하고 되묻자 더 이상 질문하지 못해
저희 어머니는 원래 몸이 약하고 위장이 안 좋으셨는데, 언젠가부터 피곤하다며 자주 누우셨고 식사를 잘 못하셨습니다. 몇 개월 앓으시던 어머니는 저에게 “이 길은 참길이니까 끝까지 잘 따라가야 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불러 달라 하셔서 식구들이 찬송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눈을 감으며 운명하셨습니다. 그때가 1961년 8월 4일이었습니다.
당시는 하나님께서 정치적, 종교적 핍박으로 영어에 계셨기 때문에 매일 저녁 머리맡에 물을 떠 놓으면 영적으로 축복해 주시던 때였습니다. 어머니를 입관할 때 그 생명물로 장례반 권사님들이 시신을 씻기셨습니다. 그런데 시신을 씻기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창문을 열어 놔도 삼복더위에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아주 시원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지만 무더운 여름날 냉장고 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것처럼 그런 바람이 온 방을 강하게 휘감고 돌아서 참 신기했습니다.
생명물로 어머니 시신을 씻기자
삼복더위인데도 예배 마칠 때까지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 불어와
그것이 성신의 바람임을 처음 알아
생명물로 다 씻긴 후 어머니를 봤을 때 입술이 얼마나 발그스름한지 화장을 한 것 같았습니다. 편찮으신 후로 창백하고 혈색이 좋지 않았는데 뽀얗게 핀 피부와 두 볼에 홍조가 감도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했지만 곱게 핀 어머니 얼굴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져서 자꾸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예배를 마칠 때까지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는데 어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성신의 바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시신이 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권능이 얼마나 크신지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귀한 은혜를 주시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962년에는 덕소신앙촌이 세워지고 저희 가족 모두 덕소에 입주했습니다. 그즈음 학교를 마치고 입대한 남동생이 부대의 헌병대장을 덕소신앙촌으로 모셔 온 적이 있었습니다. 폐병을 앓는 헌병대장은 갖은 약을 먹고 치료해도 낫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찰을 받으려고 남동생을 따라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찰하실 때 남동생이 옆에서 제발 낫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동생을 보시며 “걱정하지 마.” 하셨다고 했습니다. 헌병대장은 안찰을 받고 폐병이 씻은 듯이 나은 것은 물론이고 전보다 더 건강해졌습니다. 그때부터 매주 일요일이면 헌병대장과 그 부인이 덕소신앙촌으로 예배를 드리러 와서 제가 안내하며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헌병대장은 안찰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됐다며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스물아홉 살 무렵에 결혼해 살다가 서울로 이사한 후로는 홍제동제단에 다녔습니다. 1980년대에는 매주 축복일예배가 있어 기장신앙촌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들었는데, 저는 천국에서 성신의 구성체로 살게 된다는 말씀이 참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성신의 구성체는 썩어질 것을 먹지 않고 오장육부가 없기 때문에 화장실 갈 일도 없다 하셨습니다. 천국이 막연히 좋은 곳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살며 어떻게 영원히 살아도 피곤하지 않은지 설명해 주실 때 정말 천국을 만드신 분이 세세히 가르쳐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장이 나빠 1년에 한 번씩 입원
소비조합 하고부터 건강 찾아
매일 기쁘고 즐겁게 소비조합 활동
큰 복 받았다는 생각 들어
그 후 1990년 무렵에 저는 신앙촌 소비조합을 시작했습니다. 예전부터 소비조합을 하고 싶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망설이다가 더 늦기 전에 해 보자는 마음을 먹고 시작하게 됐습니다. 원래 저는 위장이 나빠 식사를 잘 못하고 1년에 한 번씩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지만 소비조합을 하고부터 밥맛이 좋아지고 입원하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일산 신도시로 다니며 판매하다가 신앙촌상회를 열고 나니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바쁘게 다녀도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새 몸이 된 것처럼 가뿐했습니다. 소비조합을 하며 매일 기쁘고 즐겁게 지내면서 큰 복을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즈음 저는 하나님 말씀 책을 보며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자유율법에 대한 말씀을 보면 소사신앙촌에서 “죄를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가지요.” 하셨던 하나님 모습이 떠오르고, 안찰에 대한 말씀을 보면 안찰을 받고 병이 나아서 기뻐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따라오면서 말씀을 들었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부끄러운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 말씀을 꼭 지켜서 하나님 가르쳐 주신 대로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하나님 주신 기도의 선물과 같이 한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은혜와 미소를 간구하며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이만화 권사님 신앙체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