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관에서 성신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니 새로운 세상이 열려”
<신앙체험기 516회> 소사제2교회 백종찬 권사 1편무더운 여름날 고인을 모신 방에서 시원한 바람이
계속 관 주변으로 불어와 성신의 바람으로 고인을 지켜주셔
김천 전도관에 다니며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향기를 맡게 돼
그것이 향취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의 기도 드려
저는 1942년 충북 옥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농가의 외아들이었던 저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보리, 벼, 감자, 수박, 참외 등을 키우셨고, 풍년이 든 해에는 장터에 나가 작물을 판매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식구들 먹을 것조차 넉넉지 않은 날이 많았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저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아는 분의 소개를 받아 서울의 한 원단 가게에서 일을 배웠습니다. 이후 중매를 통해 22살에 결혼하여 경북 김천에 자리를 잡고 작은 원단 가게를 운영하며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가장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에 비해 제 수입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며 가게를 잘 되게 하려고 다방면으로 애쓰고 노력했지만, 형편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의지할 곳도,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던 저는 앞길이 막막하여 신에게 소원이라도 빌어보자는 심정으로 가까운 장로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교회에 다니며 열심히 철야 기도도 드리고, 성가대 활동도 하고, 유명 부흥강사 집회에도 갔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근심은 더욱 쌓여만 갔고, 밤잠을 설치는 날들이 많아지더니 결국 불면증까지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 홍보차 다른 지역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가 우연히 교회 성가대 활동을 같이했던 김정범 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새 왜 교회에 오지 않냐고 묻자 김정범 씨는 이제 다른 교회에 다닌다며 전도관, 감람나무, 성신의 역사와 같은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이해가 안 된다고 하니 김정범 씨는 그러면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한번 가보자고 했습니다. 저는 궁금증이 생겨 그 주 수요일에 약속을 잡고 김정범 씨가 다니는 교회에 함께 갔습니다. 거기가 바로 김천 전도관이었습니다.
김천 전도관은 산 중턱에 있는 조그만 교회였는데, 간판도 없고 내부 시설도 아직 다 갖춰지지 않은 모양새였습니다. 김정범 씨를 따라 방석 위에 무릎을 꿇으니 곧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전도사님이 손을 모으고 참으로 뜨겁고 간절하게 찬송을 부르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전도사님은 작은 컵에 물을 따라서 교인들에게 나눠주셨는데, 그 물은 덕소신앙촌에서 박태선 장로님이 축복해주신 생명물이라고 했습니다. 다 같이 물을 마시고 예배실에서 교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들 너무나 착하고 순박해서 계속 이 교회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새벽예배를 나가며 전도관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67년이었습니다.
전도관을 다닐수록 찬송을 부르고 설교를 듣는 시간이 너무나 즐거워졌습니다. 전도사님이 성경 말씀을 풀어주실 때마다 새롭게 깨달음을 얻었고, 감람나무이신 박태선 장로님을 통해 은혜가 내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교인들의 은혜 체험담이 너무나 놀랍고 신기해서 푹 빠져서 듣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가 있기도 했습니다. 새벽예배 시간이 늘 기다려졌고, 전도사님을 따라 심방도 다니며 하루하루 신앙생활에 더욱 정성을 쏟았습니다.
하루는 김천 전도관으로 가는 언덕 옆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몹시 신경 쓰였습니다. 보기에도 좋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풀을 베야겠다고 마음먹고 집에서 낫을 가져와 맨손으로 풀을 베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고 나니 언덕길은 깨끗해졌는데, 맨손으로 풀을 벤 탓인지 풀독이 올라 손등이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별일 아니라 생각하고 버텼더니 얼마 뒤에는 더욱 퉁퉁 부어올라 고름까지 차기에 안 되겠다 싶어 바늘로 환부를 찔러 고름을 빼냈습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던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전도사님이 주셨던 축복 크림이 생각나 손등 위에 듬뿍 발랐습니다. 그 축복 크림은 박태선 장로님께서 직접 축복해주신 크림이라고 했는데, 신기하게도 축복 크림을 바르자마자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만에 언제 그랬냐는 듯 상처가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병원에 가도 그렇게 빨리 낫지는 못할 거라며 주변 사람들도 무척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1967년 덕소신앙촌에서 생명물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모습
김천 전도관을 다닌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전도관에 다니는 학생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입관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을 하느라 입관이 모두 끝난 후에야 가게 되었는데, 고인을 모신 방문을 여는 순간 너무나 시원한 바람이 확 불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에어컨 바람처럼 차고 시원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때가 여름이어서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는데, 방 안에 있으니 옷이 금방 마를 정도였습니다. 방 안에 앉아 지켜보니 창문 하나 없는데 어디선가 바람이 계속 불어와 관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방문까지 닫고 있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제가 계속 신기해하니까 교인분 중 한 분이 성신의 바람으로 고인을 감싸 지켜주시는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저는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장로교회에 다닐 때는 추상적으로만 하나님을 믿어왔는데, 전도관에 온 지 두 달 만에 실제 하나님의 권능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제야 김정범 씨가 여러 번 이야기했던 성신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우선 장로교회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을 만나 전도관에 다녀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저는 낙심하지 않고 서울에서 일할 때 친하게 지냈던 임판기라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전도관을 소개해 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판기가 제 편지를 받고 바로 김천으로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판기가 내려왔을 때는 마침 김천 전도관 신축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저도 공사에 참여하여 바삐 일하던 시기였는데, 고맙게도 제 상황을 지켜보던 판기가 별말 없이 작업복을 입고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했는데 묵묵히 함께해주는 판기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판기는 공사 현장에서 청년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전도관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었고, 새벽 예배도 같이 드리더니 나중에는 무언가 결심한 바가 있는지 다른 지역 전도관을 지으러 가는 행렬에 동참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판기가 전도관의 일원이 된 것이 너무나 기뻤고, 판기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튼튼한 감람나무 가지가 될 수 있도록 기도드렸습니다. 이후 판기는 생의 마지막까지 천부교인으로서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또한 나중에 전도된 판기의 동생 임영진 권사는 현재 기장신앙촌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축복일에 만나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든든한 신앙의 동지가 되었습니다.
김천 전도관에 다닐 때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예배가 모두 끝난 일요일 저녁, 교인들이 둘러앉아 삼삼오오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혼자 머릿속으로 ‘전도관에서 은혜를 알게 되었는데, 전도관을 만드신 박 장로님은 어떤 분이실까?’ 하고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머리카락 타는 냄새 또는 퇴비 냄새같이 고약한 냄새가 맡아졌습니다. 하도 지독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걸어갔는데 계속 냄새가 나더니, 잠시 후에는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났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좋은 향기는 처음 맡아보는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라일락이나 백합꽃같이 은은하고 좋은 냄새였습니다. 향기는 코끝에서 진해졌다가 약해졌다가 하기를 반복했는데, 그때 제 머릿속에서 ‘이것이 말로만 듣던 향취구나!’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예배시간에 죄가 타는 냄새와 향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제가 그 은혜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랜 시간 저를 괴롭혔던 불면증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형편이 나아진 것도 아닌데 먹고 사는 일에 대한 근심 또한 사라졌습니다. 은혜를 받으려고 노력하니 마음이 부자처럼 풍족했고, 머리는 맑았습니다. 장로교회에 다닐 때는 느껴본 적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나온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백종찬 권사/소사제2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