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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에서는 자유율법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조연주 님(1)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165

저는 1937년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단주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들을 따라 영광읍 장로교회에 나가게 된 저는, 나이가 들면서 성가대와 반사 활동을 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던 1964년이었습니다. 저와 친자매처럼 지내던 주민대(현재 광주 서동교회 권사)가 저희 동네에 있는 영광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민대는 저에게 전도관에 나와 보라며 권유했지만 저는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가끔씩 민대와 저는 서로 전도관이 참길이다, 장로교회가 진짜다 하며 옥신각신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으로도 절대로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은
‘착하게 살면 죽어 천당간다’는 장로교회의 가르침과 너무도 달라
‘세상에, 이렇게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도 있구나’하고 놀라

예배가 있는 일요일이나 수요일이면 다른 동네에서 전도관으로 오는 어른 분들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얼굴을 익히게 되면서 그분들이 저에게 전도를 하셨는데, 이상하게도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아주 향긋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난생처음 맡아 보는 그 향기는 꽃향기에 비교할 수도 없고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좋은 냄새였습니다.
하루는 길에서 전도관 교인 분들을 만났을 때 제가 물어봤습니다. “집사님들은 고급 화장품을 쓰시나 봐요? 아주 좋은 냄새가 나요.”라고 했더니, 그분들은 웃으시며 “화장품은 안 쓰는데, 전도관에 나오면 은혜를 받을 수 있어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전도관에서는 향기로운 향취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로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저는 ‘정말 그럴까?’ 하며 더욱 궁금해졌고,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수요일 저녁 스스로 전도관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자그마한 초가집인 영광전도관에 도착해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전에 맡았던 것과 똑같은 향기가 제 코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열 명 남짓한 교인들이 모여 예배드릴 때 저는 ‘정말 은혜가 내릴까?’ 하며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축복 캐러멜이라며 캐러멜을 몇 알씩 주었는데, 좀 전에 맡았던 향기가 또다시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전도관 분들이 이야기하던 ‘은혜’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전도관에 무엇이 있긴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전도관에 대해 점점 관심을 갖게 되어 낮에는 장로교회에 나가고 밤에는 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전도관에서 찬송 부를 때 손뼉을 치는 것이 어색했던 저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손뼉을 치게 되었습니다. 전도관에서는 생각으로도 마음으로도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자유율법’을 무척 강조했는데, 그런 말씀은 장로교회에서 전혀 들어 보지 못한 말씀이었습니다. 장로교회에서 “착하게 살면 죽어서 천당에 간다.”고 막연하게 배웠던 것과 달리, 전도관에서는 죄에 대해 세밀하게 구분하며 절대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자유율법에 대해 알게 되면서 ‘세상에, 이렇게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도관에서 듣는 설교 말씀이 마치 저에게만 하시는 말씀처럼 절실하게 와 닿았습니다. 제 마음은 차츰 전도관으로 기울었지만 장로교회에 가던 발걸음을 끊을 수는 없었습니다. ‘건물도 크고 교인들도 많은 번듯한 장로교회에서 자그마한 전도관으로 옮기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까?’ 하는 생각에 남들의 이목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박태선 장로님께서 광주전도관에 오셔서 집회를 하신다고 하기에 민대와 함께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대도시 광주에 위치한 전도관은 영광제단과 달리 규모가 무척 컸습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제단에 꽉 차서 뒷자리에 간신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람들이 워낙 많은 데다 단상과 거리가 멀어 박 장로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설교를 끝내시며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이 제 귀에 똑똑히 들려왔습니다. “오늘 이곳에 처음 오신 분도 있고 기성 교인도 많이 왔어요. 여러분들이 구원을 원하신다면 전도관에 나오셔서 은혜를 받으세요.”
고요한 수면에 큰 파문이 일어나듯 그 말씀이 귓가에서 메아리쳤습니다. “구원을 원하시면 전도관으로 나오세요.” 어느새 굵은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죄 용서하시고 이 죄인을 받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진심에서 우러나올 때, 영광제단에서 맡았던 향취가 다시금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향취는 맡아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저를 감싸면서, 남들의 이목을 살피던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날 이후로 장로교회에 완전히 발길을 끓게 되었습니다. 1964년 10월 28일 그렇게 저는 전도관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꿈속에서 영광읍 장로교회 교인들이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저희 집을 향해 쏜살같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꿈이 하도 생생하여 ‘오늘 무슨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약한 저를 지켜 주세요.’ 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날 오전 10시쯤 되었을 때 영광읍 장로교회 김정기 목사와 교인 10여 명이 저희 집에 왔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저를 칭찬하기도 하고 전도관에 가지 말라며 달래다가 제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전도관은 이단이라며 큰 소리를 냈습니다. 그때 제 몸은 마치 불덩이가 된 것처럼 점점 뜨거워지며 마음이 편안하고 용기가 생겼습니다. “제가 전도관에 나가서 은혜 받은 체험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이젠 장로교회에 안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들은 화를 내면서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며 떠났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에 마음속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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