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같은 은혜를 받으니 그 은혜를 계속 간구하게 돼
<신앙체험기 517회> 영주교회 엄선희 권사 1편예배실에서 기도드리던 중 백합꽃 향기 같으면서도
산뜻하고 시원한 향 맡아져 향취 은혜임을 깨닫게 돼노구산 집회에서는 사람들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할 정도로
이슬 같은 은혜가 집회장에 자욱이 퍼져반사 활동 당시 예배실에 들어갔는데
박하사탕처럼 시원한 것이 목으로 넘어가고
가슴 속이 시원해지며 처음 맛 보는 기쁨이 솟아나
엄선희 권사/영주교회
저는 1941년생으로 경기도 오산에서 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살던 집 바로 옆에는 앞마당이 유난히 넓은 감리교회가 있었고, 저는 그 마당을 놀이터 삼아 하루가 멀다하고 뛰어놀았습니다. 매일 앞마당에서 노는 저를 본 교회 선생님이 1년 동안 일요일 예배에 빠지지 않으면 연필과 노트를 준다고 하셔서 그 말에 혹해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는 제 또래가 많이 있었고, 친구들을 사귀고 어울려 노는 재미에 푹 빠져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다 열 살 무렵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홀로 생계를 책임지시던 어머니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제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저희 남매를 데리고 서울 영등포로 이사하셨습니다. 이제 막 군에서 제대한 큰오빠도 어머니를 도와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지만,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입이었기에 저는 등록금 문제로 학교를 그만둬야 했습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하게 되니 새로 이사한 낯선 동네에서 친구도 없이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찬송을 부르며 지나가는 언니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저도 그 찬송가 알아요. 언니들은 어느 교회에 다니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언니들은 박태선 장로님이 세우신 전도관에 다니고 있다며, 이만 명이 들어가는 큰 제단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전도관이라는 이름은 낯설었지만, 교회에 다닐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저는 언니들에게 교회에 꼭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서 그 주 일요일에 이만제단에 가게 되었습니다.
전차를 타고 노량진역에서 내린 뒤 한강 다리를 건너 도착한 이만제단의 풍경은 무척 놀라웠습니다. 이만제단에 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고, 건물 안에 들어가니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무척 넓은 공간이었음에도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뒷사람의 무릎을 깔고 앉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예배에서 저는 처음으로 “죄를 씻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감리교회에 꽤 오래 다녔지만 죄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기에 그 말씀이 매우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단순히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여겨온 저는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씻어 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만제단에 다녀온 뒤로 저는 집과 가까운 영등포 갑구 전도관을 찾아갔고, 얼마 뒤에는 새벽예배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실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기도를 드렸는데, 제 기도의 제목은 언제나 ‘저의 죄를 씻어주세요’였습니다. 그렇게 매일 기도를 드리던 어느 날 예배를 드리던 중 코끝에 향기로운 냄새가 맡아졌습니다. 백합꽃 향기 같으면서도 더 진하고, 동시에 산뜻하고 시원해서 말로 다할 수 없이 좋은 냄새였습니다. 계속 그 향기를 맡으니 몸이 매우 가벼워져서 몸의 무게가 아예 사라진 듯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은혜 받은 것이라 했는데 생전 처음 겪어보는 신기한 체험이었습니다.
저는 평일과 새벽에는 영등포 전도관에서, 주말에는 이만제단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이만제단에는 하나님께 안찰을 받고 병을 고치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병자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한명 한명 빠짐없이 안수해주셨고, 안수를 마치신 후 병이 나은 사람들은 일어나라고 외치시면,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자신의 병이 나았다고 증거했습니다. 이만제단에 다니며 또 한 가지 신기했던 것은 예배실에 사람들과 병자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 있어도 구린내는커녕 향취가 진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머리카락 타는 듯한 냄새가 맡아지기도 했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제가 무언가 타는 냄새가 난다고 말하니 주변에서 그것이 바로 죄가 타는 냄새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루는 이유도 없이 이가 몹시 아픈 것이었습니다. 치통은 며칠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져서 밤잠을 못 이룰 정도였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병원에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전도관에 같이 다니던 친구에게 이 사실을 말하니, 구역장을 맡고 계신 권사님 댁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권사님은 갑자기 찾아온 저희를 따뜻하게 반겨주셨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생명물 한 컵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생명물을 마시는 순간 참을 수 없던 치통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다시는 이가 아프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권능을 직접 겪어보니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 소사신앙촌 오만제단 신축 부지에서 열린, 연인원 70만 명의 대 군중이 참석한 노구산집회. (1958.6.30.~7.5.)
1957년 말에는 소사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는 교인 오만명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일명 오만제단이 지어질 예정이었고, 그 신축 부지가 있던 노구산에서 집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저도 노구산 집회에 참석했었는데 그날 이슬 같은 은혜가 구름처럼 집회장에 자욱이 깔렸던 기억이 납니다. 어찌나 은혜가 많이 내렸던지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할 정도였습니다. 오만제단의 신축 공사가 시작됐을 때 저와 친구들은 공사를 돕고 싶은 마음에 시간만 있으면 소사로 가서 질통에 흙을 퍼담아 나르며 기쁘게 일손을 거들었습니다. 완공된 뒤에는 집에서 거리가 멀었음에도 일부러 오만제단까지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소사신앙촌은 걸어 다니기만 해도 백합꽃 향기 같은 진한 향취가 맡아졌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오만제단에서 하나님께 안수를 받았는데, 입안에서 참기름처럼 고소한 것이 목으로 꿀꺽꿀꺽 넘어갔습니다. 누가 제 코앞에서 참기름 병을 연 것도 아니고, 참기름을 입에 넣어준 것도 아닌데 고소한 맛이 나니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심지어 모든 예배가 끝나고 친구와 밥을 먹을 때까지도 계속 고소함이 느껴져서 “목으로 고소한 것이 넘어가지 않니?”하고 물으니, 친구도 깜짝 놀라며 본인도 그렇다며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은혜를 받을 때 고소한 향을 느끼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직접 체험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 하나님께 더 많이 안수를 받고 싶었습니다. 마침 주일학교 반사들은 하나님께서 안찰을 해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곧장 반사에 지원했습니다. 반사가 된 뒤에는 아이들을 챙기고 말씀 공부를 가르치느라 하루가 더욱 바빠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 먼저 예배실에 들여보내고 가장 마지막으로 예배실에 들어갔는데, 그 순간 박하사탕을 먹은 것처럼 아주 시원한 것이 목으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시원함과 그 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은 경험해 본 적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예배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 오른쪽 하단은 엄선희 권사가 이만제단 반사들과 소사신앙촌 오만제단 조감도 앞에서 찍은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엄선희 권사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