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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같은 은혜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돼”

<신앙체험기 515회> 충무교회 정봉남 권사 1편
발행일 발행호수 2652

원효로 전도관에서 기도하던 중 상상조차 못 할 만큼 은은하고 감미로운 향기 맡아
사탕처럼 달고 시원한 물이 목으로 넘어가면서 몸 전체가 시원하고 가벼워져
과거에 잘못했던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떠오르면서 멈출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
어느 순간 속이 시원해지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말로 형용 못 할 기쁨 흘러넘쳐

저는 1940년 전라남도 광양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10살이 되던 해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시면서 평범했던 일상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남은 식구들은 생계를 감당하지 못해 뿔뿔이 흩어져 각자 다른 친척 집에 얹혀살게 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25 전쟁까지 터지고 말았습니다. 서울에 있는 당고모네 집에 얹혀살게 된 저는 전쟁통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다 보니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커져서 그 마음을 달래고자 장로교회에 다니며 가족들과 같이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로교회에 함께 다니던 친구 한 명이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박 장로님 집회에서는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놀라운 기사 이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신기했던 저는 친구를 따라 집회가 열리는 원효로 전도관에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때가 1956년이었습니다.

원효로 전도관은 공장 건물 뒤편에 마련되어 있었고 예배실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얼마나 인파가 몰렸던지 다른 사람의 무릎 위에 겹쳐 앉아야 할 정도였고, 저와 친구는 겨우 자리를 잡고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집회 사흘째 되던 날에는 새벽예배가 끝나고 박 장로님께서 안수를 해주셨는데, 그 많은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시며 어린아이 하나까지 빠뜨리지 않고 일일이 안수해 주시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그런데 안수를 마치신 후 박 장로님께서 “병이 나은 사람은 일어나세요”라고 말씀하시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나 자신이 병에서 나았다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신기한 광경을 처음 본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다음날, 예배실에서 기도드리던 중 어디선가 누린내가 풍겨왔습니다. 마치 머리카락을 불에 태운 듯한 지독한 냄새였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옆에 있던 친구에게 “큰일 났어. 누가 담배 피우다가 남의 머리카락을 태운 것 같아. 냄새가 너무 고약해”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친구는 아무 냄새도 안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골치가 아플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나는데 친구는 전혀 맡지 못한다니 참 이상할 노릇이었습니다.

이상하다고 여기며 다시 기도에 집중하는데, 순간 고약한 냄새가 싹 사라지고 이번에는 믿을 수 없이 좋은 향기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향기는 너무나 신비로워서 세상에 이런 향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할 만큼 은은하고 감미로운 향이었습니다. 향기를 맡고 나니 마치 사탕을 먹은 것처럼 달고 시원한 물이 목으로 넘어가면서 몸 전체가 시원하고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며 과거에 잘못했던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을 지나갔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동생에게 줄 우유를 뺏어 먹은 일부터 시작해서 크고 작은 잘못들이 모두 떠올라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펑펑 눈물을 쏟으며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고 한참 동안 기도를 드렸는데, 어느 순간 속이 시원해지면서 몸이 공중에 둥둥 뜨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늘로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느낌과 함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말로 형용 못 할 기쁨이 넘쳐흘렀습니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서 저는 너무나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초창기 원효로 구제단에서 설교하시는 하나님 모습. 1956년 초.

또 원효로 집회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참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이렌 소리와 함께 소방차가 교회 앞까지 들이닥쳤습니다. 소방대원이 예배실 안까지 들어와 주변을 살피더니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에게 혹시 이곳에서 불이 나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하자, 소방관은 분명히 교회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망원경으로 확인하고 출동했는데 이상한 일이라면서 돌아갔습니다. 저도 그때는 단순히 소방서의 착각이겠거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예배 시간에 교회 건물 위로 불기둥 같은 은혜가 내렸다는 말을 나중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또한 새벽예배를 드릴 때 예배실 안에 뽀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는 그 광경을 보면서도 “왜 예배실에 안개가 내리지?” 하고 이상하게 여기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서야 저는 그 모든 체험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이슬 같은 은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회 마지막 날, 박 장로님께서는 집회가 끝나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깊이 새기며 원래 다니던 장로교회로 돌아가 신앙을 이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예배와 기도를 드려도 원효로 집회에서 체험했던 은혜와 기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때 받았던 은혜가 더욱 그리워지면서 슬픈 마음마저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내던 어느 날 꿈을 꿨는데, 꿈에서 누가 “봉남아 봉남아”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박태선 장로님께서 저를 부르고 계셨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온화한 얼굴로 “봉남아, 왜 그리 슬퍼하고 있느냐. 내가 너를 버리지 않을 테니 더는 슬퍼하지 말아라”하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꿈을 꾸고 며칠 뒤 누군가 집에 찾아왔는데, 평소 알고 지내던 전도관의 전도사님이었습니다. 반가워하며 맞이했더니 전도사님은 이만제단(서울중앙전도관)이 다 지어졌으니 이제 이만제단으로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알겠다고 말하고 일요일에 이만제단에 가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밖에 나가보니 버스며 전차며 전봇대며 가는 곳마다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 포스터가 붙어있어 박 장로님이 얼마나 유명한 분이신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만제단에 도착해보니 교회 건물은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연세 많은 어르신들이 언덕을 오르기 쉽도록 부축해 드리거나, 가방을 대신 들어드리는 기특한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만제단 예배실에 앉아 박 장로님께서 인도하시는 예배를 드리니 원효로 전도관에서 느꼈던 넘치도록 충만한 기쁨이 다시 솟아나면서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마음을 다해 즐겁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만제단에서 또 한 번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강대상을 받침대로 쾅 하고 내리치시는 순간, 거기서 번쩍하고 불꽃이 튀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광경이라 처음에는 제 눈을 의심했지만, 박 장로님께서 단상을 내리치실 때마다 불꽃이 튀어나오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박 장로님께서 보통 분이 아니심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다니던 장로교회에 발길을 끊고 이만제단에 다녔습니다. 저는 이만제단에서 여청모임에 참여하여 말씀 공부도 하고, 전도와 심방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또 성가대원으로도 활동했는데 사람들과 호흡을 맞춰 찬송을 부르는 일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교회 활동에 점점 재미를 붙이다 보니 주말에는 평소보다 늦게 집에 들어갔는데, 하루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신 당고모께서 소리를 지르며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제 방으로 들어가 ‘이제 교회에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속상함을 감추지 못하고 거칠게 외투를 벗다가 그만 장식장 모서리에 손등을 세게 찧고 말았습니다. 너무 아파 손등을 보니 살이 깊이 패여서 뼈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급히 보관해 두었던 축복솜을 꺼내 생명물에 적신 뒤 손등 위에 조심스레 얹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서 살며시 솜을 들춰보았는데 신기하게도 뼈가 보일 정도로 패였던 상처가 벌써 아물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앞으로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 위급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신 축복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하고 진심으로 뉘우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뒤의 일입니다. 전도사님께서 저를 따로 부르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이번에 전도사님의 딸이 소사신앙촌 안에 있는 시온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제가 원한다면 신앙촌에 같이 가서 살아도 된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기뻐서 꼭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전도사님 딸의 입학과 동시에 소사신앙촌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소사신앙촌의 D동 아파트였는데, 창 밖으로 탐스러운 꽃나무들과 화초들이 보이는 참으로 예쁜 집이었습니다.

그렇게 소사신앙촌에서 살게 되었는데 새벽예배 가는 길에 자주 향취를 맡았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당시에는 오만제단을 짓던 중이어서 땅을 고르는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교인들은 예배가 끝나면 제단 터에서 돌을 하나씩 지고 내려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돌을 가져온 사람들에게 안수를 해주셨는데, 안수를 받으면 마음에 기쁨이 오면서 죄짓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신앙촌에서 1년간 살고 다시 서울 당고모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호에 이어)

정봉남 권사/충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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