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같은 은혜로 마음의 괴로움까지 사라지게 해주시니”
<신앙체험기 501회 홍제교회 선동순 권사 1편>1929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난 저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서 3남 1녀를 낳고 서울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대체로 건강하게 자랐는데, 유독 큰아들만 4살 무렵 천연두에 걸려 초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도 별 차도가 없어 가족 모두의 걱정을 샀습니다. 아들의 얼굴과 온몸에는 크고 작은 수포들이 터지고 아문 자국들이 가득했고, 눈알까지 새빨개져서 보기에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를 보다가 불현듯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던 박태선 장로님이 떠올랐습니다. 서울에 계신 시어머니는 본디 독실한 감리교인으로 며느리인 저를 전도하여 교회에 다니게 하실 정도로 열심인 분이셨는데, 몇 개월 전에 박태선 장로님이 인도하시는 한강집회에 참석하셔서 은혜가 내리고 병자들이 낫는 모습을 목격하고 원효로 제단에 다니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박태선 장로님께 가면 아이의 병도 나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안고 원효로 제단에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픈 아이를 데리고 함께 갈 법도 한데, 그때는 별생각 없이 아이는 집에 두고 저만 원효로 제단에 갔습니다.
시어머니를 따라간 원효로 제단은 아직 교회 건물이 지어지지 않아서 임시로 박태선 장로님이 경영하시던 공장 2층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조금 기다리니 박태선 장로님이 나오셔서 찬송을 인도하셨고, 저는 찬송을 따라 부르며 예배 시간 내내 아들의 병이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다음 주에도 원효로 제단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바로 다음 날부터 아들의 증세가 갑자기 호전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박 장로님께 직접 안수 받은 것도 아니고, 저 혼자 박태선 장로님이 인도하시는 예배에 참석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아이의 피부 발진은 점점 수그러들었고, 얼굴에 남은 약간의 흉터만 제외하고는 온몸의 상처들이 사라져서 주변 사람들도 놀라워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에 앞으로 원효로 제단에 다녀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그즈음 박 장로님께서는 구역별로 심방을 다니시며 교인들의 집에 들르셔서 기도와 안찰을 해주셨는데, 이때 박 장로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무더기 심방’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저도 몇 번인가 심방을 따라갔었는데 어떤 젊은 여성의 집에 갔을 때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그 사람의 배를 안찰해주셨는데, 장로님 손이 채 닿기도 전에 배에서 불쑥 불쑥 무엇인가 솟아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몹시 아파했는데 그것은 죄가 성신에 대항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워하던 여자의 표정이 평온해질 때 쯤 박 장로님께서는 손을 떼셨고,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놀랍고 신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무더기 심방을 하실 때 저희 집에도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희 남편이 병원에서 주사를 잘못 맞는 바람에 엉덩이가 곪아 꼼짝 못 하고 누워있을 때였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남편의 환부를 보시더니 솜을 비벼서 탁 붙여주시고 가셨습니다. 박 장로님이 떠나신 후 집으로 돌아와 보니 방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나고 있었습니다. 방안을 가득 채우는 진한 향기가 대체 어디서 나는 것인가 살펴보니 박 장로님께서 남편에게 붙여준 솜에서 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박 장로님께서는 향취 은혜를 내리신다고 한 말이 사실이었음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남편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의사가 집에 찾아왔는데 환부에 솜을 붙여 놓은 것을 보더니 “상처가 썩어도 나는 이제 모른다”며 화를 내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의사의 말과는 반대로 남편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서 삼 일 뒤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원효로 제단에 다니며 제게도 큰 변화가 생겼는데 바로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시누이 두 명과 함께 살았는데, 해야 할 집안일이 산더미처럼 쌓여도 아무것도 안 하면서 저에게만 일을 시키는 시누이들이 미웠습니다. 그 마음이 점점 커지다 보니 저 자신도 무척 괴로웠는데, 원효로 제단에 나간 후부터는 시누이들을 봐도 화가 나지 않고 마음이 편안한 것이었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저희 집에서는 여기저기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던 여자아이를 한 명 거둬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어려운 처지를 안타까이 여겨서 자식과 같이 키웠으나, 도통 말을 듣지 않아 동네 사람들마저 혀를 찰 정도였습니다. 저는 아이 때문에 속상하고 화나는 날이 많았는데, 원효로 제단에 다니다 보니 화를 내는 것도 죄라는 생각이 들어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드리자 답답했던 마음이 확 풀어지며 아주 가벼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아이를 더 큰 사랑으로 대할 수 있었고, 아이는 주변의 우려와 달리 반듯하게 잘 성장하여 성인이 된 후 고향인 강원도에서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 원효로 제단에 간 이유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으나 아들은 물론 남편의 병까지 씻은 듯 낫게 되는 놀라운 권능을 직접 보니 그때부터는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림 없이 제단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과거 10년 넘게 감리교회에 다닐 때에도 어찌하지 못했던 마음속 괴로움까지 사라지게 해주시니 저는 진짜 하나님이 이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을 때도 매우 당연한 일이라 생각되었습니다.
1957년 4월에는 서울 청암동에 서울중앙전도관이 완공되었습니다. 서울중앙전도관은 이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하여 일명 이만제단으로 불렸는데, 4월 30일은 이만제단 개관 집회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3층 건물이 꽉 들어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제단에 모였고, 며칠간 계속된 집회에도 피곤한 줄 모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께서 “병자들은 일어나라”고 외치시자 병이 나았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습니다. 벙어리가 말이 트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병이 나았다고 증거하는 모습은 너무나 경이로웠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안수를 해주실 때 많은 사람들 사이를 가볍고 빠르게 지나다니시며 양손으로 참석자들의 머리를 탁탁탁탁 치고 앞으로 가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도 자리에 앉아 안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머리를 탁 쳐주시자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마음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렇게 기쁜 것은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