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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주시는 감람나무를 만난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신효균 승사(2) / 부산 기장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517

노구산 집회(1958. 6.30~7.5.)에서 설교하시는 하나님

1958년 1월 하나님께서 안성전도관에 오신 날은 눈이 하얗게 쏟아졌습니다. 낮에는 이만제단에서 나온 특전대가 밴드대를 앞세우고 행진하며 집회를 알렸고, 저녁에는 안성전도관에서 영사기로 영화를 보여 줘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들썩들썩했습니다. 영화 속에는 이만제단에서 사람들이 가득 모여 예배드리는 모습과 한창 건설 중인 소사신앙촌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처음 보는 영사기를 신기해했고 신앙촌이라는 곳이 저렇게 발전하고 있냐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재미있게 영화를 볼 때였습니다. 갑자기 밖에서 수런수런하더니 누가 창문에 돌멩이를 던지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의아할 때 갑자기 깡패들이 쳐들어와 특전대원을 구타해서 쓰러뜨리고 영사기를 부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깡패들은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밟으며 한참 난동을 부렸습니다. 저는 욕지거리를 하며 사람들을 때리는 그들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 전도관에 몰리자
기성교회에서 폭력까지 행사하는
비상식적인 모습에 동네 사람들은
종교인들이 그럴 수 있냐고 해

알고 보니 그 일은 안성에 있는 성결교회와 장로교회, 감리교회가 깡패까지 끌어들여서 벌인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난동을 지시하고 앞장선 사람들이 그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청년들이었던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종교인들이 그럴 수 있냐고 했습니다. 온 동네가 전도관으로 몰려가니까 기성교회가 약이 오른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폭력을 쓰면 되냐고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해 여름 소사신앙촌 노구산에서 집회가 열렸을 때는 산이 덮이도록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연 70만 명이라고 했는데 저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난생처음 봤습니다. 열흘 동안 집회에 참석하려고 집에서 먹을 것을 싸들고 갔지만 웬일인지 배가 고프지 않아 별로 먹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소나기가 쏟아져도 피할 생각보다는 자리를 뺏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집회장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집회 기간 내내 마냥 기쁘고 즐거워서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좋은 적이 있었나 싶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산 정상의 단상에 서셔서 “내가 바로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고 향기를 내리는 감람나무”라고 외치시자 사람들은 산천이 떠나가도록 손뼉을 쳤습니다. 저는 ‘은혜를 주시는 감람나무를 만난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하며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참길을 알았으니 변함없이 따라가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노구산 집회에 수많은 사람들 모여
집회 기간 내내 기쁘고 즐거워
이제 참길을 알았으니 변함없이
따라가겠다는 결심을 갖게 돼

그 후 남편의 발령지를 따라 마포 을구제단에 가 보니 호박밭에 천막을 크게 쳐 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교인들과 힘을 모아 제단을 깨끗이 지은 후에 날마다 심방을 다녔는데, 어느 날 교인 집에서 심방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 어디선가 아주 좋은 향기가 진동하더니 몸이 둥둥 떠오를 것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철야 기도를 할 때 받았던 그 향취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교인들 몇 명이 모여 예배드리는 시간도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고 함께해 주신다고 생각하니 참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그때 향취가 제 온몸을 감싸는 것처럼 느껴지며 마음이 그렇게 포근하고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제단에 교인들이 점점 늘어나서 주일학생 150명과 어른들 400명이 잔칫날처럼 북적북적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호박밭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던 곳에 교인들과 힘을 모아 제단을 깨끗이 지은 후
어느 날 교인 집 심방예배를 드리던 중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진동해
전도를 계속하며 교인들이 점점 늘어나 잔칫날처럼 북적북적하게 예배를 드리게 돼

마포 을구제단에서 저는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시작했습니다. 소사신앙촌에서 여러 가지 제품이 생산돼 나왔는데 특히 두부와 간장이 인기가 좋아서 배달하는 직원을 두고 바쁘게 판매했습니다. 제대로 된 제품이 없던 시절에 잘 만든 신앙촌 물건은 환영을 받았고 저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다니며 판매하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경기도 파주로 이사한 후에도 소비조합을 계속했는데 처음에 방문 판매를 하다 단골이 많아지고 일일이 찾아다닐 수가 없어서 신앙촌 상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기장신앙촌에서 생산하는 담요와 카펫이 큰 인기를 끌어서 줄을 서서 사 갈 정도였습니다. 수십 년 소비조합을 하는 동안 신앙촌은 믿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며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촌에서 여러가지 제품 생산돼
특히 두부와 간장의 인기가 좋아
신앙촌 물건 어디 가나 환영 받아
부지런히 판매하는 재미가 있어

저는 친정어머니를 전도해 같이 전도관에 다녔는데 어머니도 소비조합을 하고 싶어 하셔서 신앙촌 간장을 판매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전에 장사를 해 보지 않으셨지만 어딜 가든 신앙촌이라면 반가워해서 즐겁게 다닌다고 하셨습니다. 연로해지신 후로는 서울 막내딸 집에서 지내시며 장위 천부교회에 다니시다가 1993년경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원래 고운 분이셨지만 임종 전에 2주 동안 잡숫지 못하면서 얼굴이 주글주글해지고 피부도 검은 빛을 띠었습니다. 그런데 장위교회 관장님과 교인들이 오셔서 생명물로 시신을 씻기고 입관예배를 드린 후에는 주름살이 다 펴지고 환하게 피었습니다. 어머니를 보는 사람마다 너무 고우시다며 탄복을 했습니다. 제부는 시신의 손을 잡고 흔들어 보더니 살아 계실 때보다 더 부드럽다고 했고, 어떻게 아기 피부처럼 뽀얘질 수 있냐며 놀라워했습니다. 또 초등학생인 조카가 “할머니가 천사가 됐어요!” 하고 소리를 쳐서 다들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기억해 주시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마음 깊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름지고 검은빛을 띠던 시신이
생명물로 씻기고 입관예배 드리자
주름살이 다 펴지고 피부가 뽀얘져
보는 사람마다 너무 곱다며 탄복해

그 후 1996년에 부산 기장으로 이사 와 기장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여성회 회장 직분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입관예배 때 관장님을 도와 시신 씻기는 일을 했는데, 그 전에도 시신이 피는 것을 많이 봤지만 직접 씻기면서 하나님 은혜로 시신이 피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처음 씻기 시작할 때는 뻣뻣하게 굳어 있어서 팔을 들거나 고개를 조금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생명물로 씻으면 어느새 노긋노긋 부드러워져서 다 씻기고 수의를 입힐 때는 보들보들한 어린 아기에게 옷을 입히는 것 같았습니다. 기장제단에서 돌아가신 권사님 한 분은 피부색이 우윳빛으로 피고 입술은 화장을 한 것처럼 고운 혈색이 감돌아서 감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핀 모습을 보면 참 기쁘고 감사해서 하루 종일 찬송이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새벽예배 때 “산기슭 외줄기 조그만 촌에 아담한 제단은 시골 전도관∼” 하는 찬송이 예배실에 울릴 때면 저는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50년 전 눈이 하얗게 쏟아지던 날 하나님께서 시골제단에 오셨던 것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고, 예배 시간에 인자하게 미소 지으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변함없이 우리 곁에서 함께하시는 그 은혜를 어떻게 다 헤아리겠습니까. 한없이 주시는 은혜에 감사드리며 하나님 가르쳐 주신 대로 맑고 바르게 살아가겠습니다. 귀한 은혜 간직하며 아름다운 세계에 가는 자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신효균 승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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