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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받고 기쁨이 샘솟아 찬송을 부르고 또 불러

방한열 권사 / 덕소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156

지난호에 이어서

그 후로 저는 이만제단에 계속 다니게 되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설교 시간마다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무척 강조하셨습니다. 교회에서 높은 직분을 맡았든, 아무리 오래 믿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되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릴 적부터 예배당 안에만 들어가면 천국에 간다고 배워 왔던 저로서는 처음 듣는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과거에 아무리 잘 믿었다 해도 지금 이 순간 죄를 안 짓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시며 “신앙은 1초 1초.”라고 하시는 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구원과 신앙에 대해 새롭게 눈뜰 수 있었고, 감리교회에서 말하는 신앙은 그저 형식일 뿐이며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25전쟁 이후 모두가 살기 힘들었던 시절
살기가 힘들어 몸과 마음이 몹시도 고단했었는데
전도관에서 은혜를 받은 뒤로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기쁜 사람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전에 다녔던 중앙 감리교회 김경환 목사가 저희 집에 찾아와서, 전도관에 가지 말고 감리교회로 돌아오라며 설득을 했습니다. 제가 목사에게 “목사님, 저는 이때껏 감리교회에 다녔지만 은혜가 뭔지 몰랐습니다. 전도관에 와서 은혜를 받고 말씀을 듣고 보니 바른 길을 찾았구나 싶은데 제가 왜 돌아가겠습니까? 목사님도 구원을 받으시려면 전도관에 오셔야 합니다.” 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는 제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되돌아갔습니다.

당시 저희 가족은 한강 둑 밑의 작은 방에 세 들어 살면서 어렵게 생계를 꾸리고 있었습니다. 참혹한 6·25 전쟁이 온 나라를 휩쓸고 지나간 그때는 모두들 살기가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직장을 구하기 힘들었던 남편을 대신해 저는 영등포 중앙 시장에서 인절미 장사를 했는데, 난생처음 해 보는 장사가 힘에 부치기도 했고 마음 또한 몹시 고단했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이만제단에 다니며 은혜를 받은 뒤로는 자꾸만 기뻐지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형편이 마음에 하나도 걸리지 않았고, 집에 있을 때나 일을 할 때 기쁨이 샘솟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찬송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이만제단에서 예배드리고 나올 때 제 마음은 은혜 받은 감격으로 벅차올랐고,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기쁜 사람인 것만 같았습니다.

이만제단에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각 동네마다 자그마한 제단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영등포 신길동에도 제단이 세워져 저는 매일 새벽예배를 그곳에서 드렸습니다. 그 즈음 네 살이던 아들 종철이가 홍역에다 백일기침까지 앓고 난 뒤로 밥을 잘 못 먹고 시름시름 아팠습니다. 약을 먹이며 정성껏 간호해도 좀체 낫지 않더니 얼마 후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신길동제단 교인들은 저희 집에서 수의를 만들고 관을 짜는 등 자기 일처럼 장례 준비를 도와주었습니다. 입관예배 때 집에 가득 모인 교인들이 힘차게 찬송을 부르고, 장례반 권사님이 아이 시신을 생명물로 깨끗이 씻겼습니다. 생전에 누르스름했던 아들의 얼굴은 생명물로 씻긴 후 뽀얗게 피어나면서 연지를 찍어 놓은 것처럼 고운 혈색이 돌았습니다. 다들 아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 예쁘게 피었다며 감탄을 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집 안에는 향긋한 향취가 쉼 없이 진동했습니다. 관을 묻고 돌아온 제부가 하는 말이, 관을 지고 가서 땅에 묻을 때까지 향취가 계속 맡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아이를 먼저 보내는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귀한 은혜로 지켜 주셔서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1958년 여름 소사신앙촌 노구산에서 집회가 열려 저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산을 하얗게 뒤덮을 만큼 많이 모였던 그때. 소나기가 퍼부어도 자리를 뺏길까 봐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고, 저 또한 비가 오면 시원하기만 할 뿐 집회장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인도에 따라 산천이 울리도록 찬송을 부르고 깨우쳐 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이 시간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은혜 받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그때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길동제단에 계속 다니던 어느 날, 교인 중에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셔서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고인은 입을 벌린 채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으며 피부가 시퍼런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명물로 다 씻긴 후에 보니, 시퍼런 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꼭 어린애 피부처럼 뽀얗게 피었습니다. 벌렸던 입이 얌전하게 다물어진 것은 물론이고, 뻣뻣하던 몸도 마디마디 부드럽게 움직여져서 편안한 모습으로 가셨습니다.

그 후 언제부터인지 제가 숨이 차면서 걸음을 걷기가 힘들어지고,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이 창백해져서 보는 사람들마다 걱정을 했습니다. 한약방에서 진맥을 짚어 보니 영양이 너무 부족하다며 약을 먹어도 몇 제를 먹어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그럴 형편이 안 되어 집에서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소사신앙촌에 입주해 계셨던 어머니가 저를 보러 오셔서는 “소사신앙촌에 들어오면 네 병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단에 다니던 남편이 그 말을 듣고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며 저에게 소사신앙촌에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남편은 곧바로 입주할 준비를 시작했고 얼마 후 저희 가족은 신앙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59년 3월이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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