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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평안으로 구원의 길 따르게 해 주신 하나님 사랑

박근성 권사(3)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12

그해 두 살 된 현숙이가 더위를 먹은 뒤로 시름시름 앓더니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전도사님을 모시고 입관예배를 드릴 때 축복 캐러멜을 넣어서 끓인 물로 아이를 씻겼는데, 창백했던 피부에 발그스름하게 핏기가 돌면서 특히 입술은 루주를 바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간 빛을 띠는 것이었습니다. 온몸이 뽀얘진 아이가 방글방글 웃는 모습으로 피어서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 모습을 이만제단 교인들과 이웃에 사는 영주교회 교인들이 많이 와서 보았으며, 전도관을 반대하던 남편도 그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점점 녹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장례 때 딸이 피는 것을 본 남편은 `나 죽으면 지옥가게 생겼어.
박 장로님 그렇게 욕하고 반대했으니`라며 깊이 후회
그 뒤 이만제단 나와 건강도 회복하고 신앙생활에 열심

그때 늑막염을 계속 앓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남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이제 죽으면 지옥에 가게 생겼어. 박 장로님을 그렇게 욕하고 반대했으니……. 지옥만은 면해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 깊이 후회하고 걱정하는 남편에게 저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만제단에 다녀 보라고 권유하였고, 남편은 병든 몸을 추슬러 이만제단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점차로 병세가 나아지더니 몰라보게 건강을 회복한 남편은 약을 전부 갖다 버렸으며, 유년 주일학교 반사가 되어 전도사님들과 함께 자주 심방을 다니면서 열심히 믿고자 했습니다.

그 후 1962년에 저희 가족은 소사신앙촌에 입주를 했습니다. 예쁜 양옥집들이 줄지어 있는 신앙촌 주택가에는 자물쇠를 찾아볼 수 없었고 사거리에 ‘주인 없는 상점’이 운영되었습니다.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경찰관들은 신앙촌에 싸움도 없고 도둑도 없어서 할 일이 없다고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이루어 놓으신 아름다운 신앙촌. 빈손밖에 없는 저희 가족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게 되었는지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오질 않았고, 저는 고향을 떠나온 뒤 처음으로 이북에 계신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 같은 평안함을 맛보았습니다.

그 후 1964년에 남편이 폐가 안 좋아지면서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안찰을 받고 싶다고 간곡하게 원하여 하나님께 안찰을 받고 돌아왔는데, 하나님께서 온유한 음성으로 남편을 부르시더니 그토록 정성스럽게 안찰을 해 주실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그 부드러운 음성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고 하면서 기도와 찬송을 계속하다가 닷새 후에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입관예배를 드릴 때 시신을 씻긴 장례반 권사님이 “이렇게 잘 핀 시신은 처음 보네요.” 할 정도로 남편은 뽀얗고 곱게 피어서 갔습니다. 그때 형편상 장례 비용이 걱정되었는데, 신앙촌의 여러분들이 장례식에 쓸 관과 수의, 쌀까지 마련해 주어서 장례식을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소비조합을 시작하여 신앙촌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판매하게 되었습니다. 저처럼 밑천이 없는 사람도 먼저 제품을 가져가서 판매한 후에 물건 값을 내도록 해 주셔서 어려움 없이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맛이 좋기로 유명한 신앙촌 간장부터 여러 가지 제품을 판매하여 세 식구의 생계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바쁘게 장사를 다니면서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어린 자식들만 하루 종일 집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제 사정을 알게 되신 옆집의 할머니 권사님들이 자주 들여다보시며 친자식처럼 돌봐 주셔서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고 가족보다 더 가까운 분들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매일 장사를 마친 후 우체국 앞의 고개를 넘어서 신앙촌에 들어올 때면 한없는 평안함이 저를 감싸면서 마음의 천국을 느끼었습니다.

그 후 1968년 8월 28일, 덕소신앙촌에 입주한 그날은 눈앞에 출렁이는 푸른 한강 물과 여기저기 예쁜 꽃밭, 그리고 웅장한 제단을 바라보면서 아이들과 함께 감탄하고 행복해했습니다. 두 아이는 시온유치원부터 시온고등학교까지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학교를 다니며 성장했습니다. 온 나라가 궁핍하던 시절, 자식 교육을 시키는 것이 지금처럼 쉽지 않은 때였지만 저는 신앙촌에서 학비에 큰 구애를 받지 않고 교육시킬 수 있었습니다.

덕소신앙촌에 입주한 후에도 소비조합을 계속하며 서울 지역으로 바쁘게 장사를 다녔습니다. 방문 판매를 주로 했던 저는 매일 여러 가정을 다녔는데, 어느 집을 가든 환대를 받으며 품질 좋은 신앙촌 제품을 판매했습니다. 저를 무척 반가워하는 고객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면서 ‘하나님, 좋은 물건을 만들어 주시고 소비조합을 하게 해 주셔서 제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끼니를 잇기가 어려워 앞이 깜깜했던 때도 있었는데, 소비조합을 하며 부지런히 일하고 알뜰하게 저축하여서 은퇴 후에도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30년 가까이 소비조합을 계속하다가 1994년에 정리하고 부산의 기장신앙촌에 입주하였습니다. 제가 소비조합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오랜 단골 고객들이 이제 만나지 못하는 것이냐고 하면서 무척 아쉬워했었습니다. 작년 추수감사절에는 서울 서빙고에 사는 고객 두 분이 죽기 전에 신앙촌 아줌마를 봐야겠다며 기장신앙촌까지 찾아오셔서 12년 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반갑고 고마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분들은 “신앙촌 아줌마, 늘 신앙촌 신앙촌 하더니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네요. 좋은 곳에 사셔서 좋으시겠어요.” 하며 웃음을 지었습니다.

저는 신앙촌의 등산로를 걸을 때면 열아홉 살에 산길을 따라 월남하던 때가 떠오르곤 합니다. 슬픔과 한숨밖에 없었던 험한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을 뵈온 후부터 한없는 위로와 평안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구원의 길을 밝혀 주시고 그 길을 가게 해 주신 하나님. 그 사랑과 희생으로 지금까지 따라왔습니다. 오늘 하루도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힘차게 살아가면서 영원한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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