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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내리는 이슬성신을 보다

임종희 권사(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170

<지난호에 이어서>
1955년 7월, 고대하던 하나님 집회가 한강 모래사장에서 일주일간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가 참석했습니다. 단상에 서신 하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쉭! 쉭!’ 하신 후 찬송가를 놓는 받침을 들어 힘 있게 치셨는데,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단상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 나와 하나님과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뽀얗게 퍼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루는 쉬는 시간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등단하실 시간이 되었을 때, 강대상에 뽀얀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아물아물 내리다가 점점 퍼져 나가면서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이 내렸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던 중,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성경 호세아서의 ‘이슬과 같이 내리는 은혜’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판사가 `이슬성신 사진이 조작됐다는 증언이 있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내가 집회를 열면 진위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고 답변
그러나 재판부는 목사들의 반대로 끝내 집회를 허락하지 않아

예배를 마치고 쉬는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집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이슬 같은 은혜를 보고 향취를 맡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회 중 하루는 하나님 인도에 따라 찬송을 부르는데, 어릴 적 있었던 일이 마치 영화 필름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무슨 깃발을 세우려고 야산에 있는 나무를 잘라 깃대를 만들었던 일이 떠오르면서, 내 것이 아닌 나무를 가져온 것은 죄가 된다는 깨달음이 마음속에 메아리쳤습니다. 예전에는 그것이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었지만 그때는 너무나도 명백한 죄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슴 깊이 뉘우치고 또 뉘우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동안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티끌만 한 죄라도 짓지 말라고 하시며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되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안타깝게 외치셨습니다. 그 절절하신 음성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아 ‘이제부터 똑바로 살아야겠다. 작은 죄라도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제 마음에 선명히 새겨졌습니다.

그해 겨울 하나님께서 서울 원효로에 전도관을 세우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배에 참석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댁 뒷마당에 마련된 원효로전도관은 기차처럼 기다랗게 생긴 예배실이었는데, 제가 간 날 입추의 여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인천에도 전도관이 마련되어 저는 그곳으로 예배를 드리러 다녔습니다. 1957년 소사신앙촌이 건설되어 다양한 생산품이 나오게 되면서, 저는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시중에 나오는 물건들은 바느질이 너무 엉성한 데 비해 시온 제품은 꼼꼼하게 정성을 들인 바느질이라 고객들이 모두 감탄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1958년 12월, 하나님께서 구속 수감되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기회가 될 때마다 공판에 참석했는데, 하루는 판사가 이슬성신이 찍힌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는 증언이 있다며 이에 대해 답변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집회를 여는 동안 카메라로 찍으면 은혜가 내리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이를 확인하려면 집회를 열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무슨 이유에선지 집회를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공판을 지켜보면서 저는 가슴속에서부터 울분을 느꼈습니다. 제가 직접 보았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분명히 체험한 그 은혜를 조작했다고 하는 상황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억울하고 참담한 일이었습니다.

1959년 3월 13일 서울지방법원에서 1심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재판정을 가득 메웠던 전도관 식구들이 판결을 받고 들어가시는 하나님을 뵙고자 앞으로 몰려갔다가 경찰들에게 밀려 이리저리 흩어졌습니다. 재판정에서 나왔을 때 저는 치미는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저도 모르게 원통하다는 탄식이 터져 나오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때 경찰들 몇 명이 “이거 악질이구나.” 하며 저를 붙잡더니 전도관 교인들이 타고 있는 차로 데려갔고, 그길로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25일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이 되신 채 봄이 오고 여름이 왔습니다. 한여름 푹푹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고생하실 하나님을 생각하면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저려 오는 아픈 세월이었습니다.

1960년 저희 가족은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온 제품을 판매하는 도매소 한쪽에는 큰 물통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물에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축복을 해 주셔서 소비조합들은 매일 생명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1962년 덕소신앙촌이 건설되면서 1차로 입주한 저는 거기서도 소비조합을 계속했습니다.

그 후 1988년, 소사신앙촌에 살던 언니가 71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어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명물을 언니 입에 넣어 주었는데, 죽은 사람은 물을 한 방울도 넘기지 않지만 생명물은 넣는 대로 다 들어갔습니다. 소사신앙촌 교인들이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생명물로 깨끗이 시신을 씻긴 후에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팔다리가 노긋노긋 움직여서 수월하게 수의를 입혔습니다. 하나님 허락하신 귀한 은혜 속에서 언니는 단잠을 자는 듯 곱게 피었고 저는 평안한 마음으로 언니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처음 뵙고 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 동안 죄짓지 말라고 안타깝게 외치시던 음성은 지금도 쟁쟁히 귓가에 울리는 듯합니다. 구원을 주시고자 그토록 안타까워하셨던 하나님. 그 말씀을 따라 오늘도 죄짓지 않고 맑게 살아가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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