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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곳곳에 세워진 구원의 방주 ‘전도관’

발행일 발행호수 2487

1. 서울 이만제단에서 예배를 인도하시는 하나님(1957년경) 2. 청주 시내를 행진하며 찬송가를 연주하는 모습(1959년경) 3. 부산 대신동전도관에서 예배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모습(1957년경) 4. 부산 영주동전도관 건축 모습 5. 영주동전도관 건설 당시 교인들이 벽돌을 나르는 모습(1957년경)

1955년 서울에 세워진 ‘원효로 전도관’을 시작으로 천부교회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대도시부터 산간벽지까지 구원의 방주가 세워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길을 찾아 모여들었습니다. 생생한 역사의 기록인 신앙체험기 중에서 전도관 건설에 관한 내용을 발췌하여 실었습니다.

■ 청주전도관

“성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도관에 오셔서 성신을 받으십시오.”

1956년 겨울, 하나님 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운천동 대마 공장 뒤에 청주전도관을 마련했습니다. 개관집회를 준비하면서 마이크를 들고 거리에 나가 집회를 알렸는데 그때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신의 역사는 한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병든 자도 좋고 가난한 자도 좋고 근심 걱정에 싸인 사람들은 다 오시기 바랍니다.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오셔서 성신을 받으십시오. 박태선 장로님께서 청주에 오십니다. 대마 공장 뒤 청주전도관에서 집회가 있습니다. 청주 시민들 많이 오셔서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당시 청주전도관의 청년들은 기성교회 목사나 장로를 찾아가 성경을 놓고 토론을 자주 벌였습니다. 어느 날인가 친구들과 함께 청주 제칠일안식교회를 찾아갔는데, 안식교회 교인들은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교회 목사와 이슬성신에 대해 토론하다가 “성경에 성신을 받으라고 돼 있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받은 증거 있으십니까?”라고 묻자, “형제여, 덮어놓고 믿어야지 너무 그렇게 캐면 안 되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음식도 독약인지 아닌지 알고 먹어야지 덮어놓고 먹었다가 독이 든 음식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물며 종교는 구원 문제가 달린 중요한 것인데 덮어놓고 믿어서 되겠습니까?” 하니, 목사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초가삼간을 늘려서 지은 청주전도관에는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하나님 집회에 참석하여 병이 나은 사람들, 성신의 역사를 깨닫게 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제단이 차고 넘칠 정도였습니다. 더 많은 교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우암산 중턱에 있는 논을 사서 제단을 신축하게 되었는데, 건축 장비가 제대로 없던 시절이라 교인들이 모두 힘을 합해 200평이 넘는 건물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계단식 논을 메워 편평하게 만들고 돌을 나르는 등 힘든 일이었지만 즐겁게 찬송을 부르며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일하다 보면 어느새 날이 저물어 통행금지에 자주 걸렸는데, 처음에는 검문을 하던 경찰들도 나중에는 “전도관 교인들, 빨리 가라.”며 무사통과로 보내 주었습니다.

우암산 중턱에 세워진 청주제단은 웅장했습니다. 청주제단에서 음악종을 울리면 아름다운 종소리가 우암산에서부터 청주 시내로 퍼져 나가곤 했습니다. 또 제단 마당에는 깨끗하고 물맛 좋기로 유명한 옹달샘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청주에 오실 때마다 그 샘에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물 위에 안개가 서리듯 뽀얗게 이슬성신이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샘에 축복을 받은 후 교인들이 그 물을 마셨는데, 저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물을 마시기 위해 옹달샘에 바짝 붙어 있다가 축복이 끝나면 잽싸게 바가지를 들고 물을 마시곤 했습니다. 돌아보면 극성 맞았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참 즐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노광자 퇴임 관장(신앙체험기 297회 / 8집 수록)

■ 부산전도관, 경남 남지전도관

“기사이적이 수없이 일어나니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전도관에 다녔습니다.”
1957년 어느 날 부산에서 살 때의 일입니다. 대신동 고모 댁에 갔다가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영주동 꼭대기를 지나면서 보니, 그곳에 큰 교회 건물 하나가 새롭게 들어서는 것이 보였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 짓는 일에 동참하여 건물 높은 곳까지 올라 다니며 바삐 움직이는데, 인부들 같지는 않고 그 교회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조금도 힘들어하는 내색 없이 즐거운 표정으로 열심히 일하는 그들의 모습을 계속 바라보며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 저렇게 애쓰는 것을 보니 너무나 부럽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얼마 동안 서 있다가 그들 중 여자 한 분에게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니 참 부럽다.”라고 하자, 제 얘기를 듣고 무척 반기면서 “전도관을 짓고 있는 중인데 우리 전도관에 나오세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여자 분이 하는 얘기가,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나타나셨는데, 박 장로님이 인도하시는 집회에서 수많은 기사이적이 일어나고 병자들이 무수하게 낫는다고 하면서 전도관은 바로 그 박 장로님이 세우신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분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즐거운 표정으로 교회를 지어
`전도관을 짓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전도관에 나오세요`

그 후 친정이 있는 남지면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고향에 남지 전도관이 생긴 것을 보고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제가 이사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전도관에 다니는 동네 분들이 찾아와 전도관에 같이 다니자고 권유하였습니다. 저는 전도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여 그분들에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분들 하는 말씀이, 박태선 장로님께서 남지면에 오셔서 부흥집회를 하셨을 때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그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는데, 그때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 전도관을 세우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남지면에 살고 계셨던 친척 아주머니는 나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는데, 박 장로님 집회에 참석하여 안찰을 받고 전도관에 다니면서부터 어느 순간 몸에 있던 흉터가 깨끗하게 없어져 나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정어머니도 박 장로님이 인도하시는 밀양 집회에서 불성신을 받고 속병이 나은 후부터 전도관에 다니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기사이적이 수없이 일어나니 마을 사람 거의 대부분이 전도관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남지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신남이 집사(신앙체험기 181회 / 5집 수록)

■ 전북 임실전도관

“지금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때”
1955년 박태선 장로님의 부산 집회에 참석했던 저는 이듬해 군산의 이모님 집에 갔다가 군산전도관 개관집회가 열린다는 포스터를 보고 집회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에 사는 숙모님 집에 갔더니 숙모님 역시 전도관에 다니고 계셨습니다. 그때 마침 박 장로님께서 무더기 심방(하나님께서 서울 시내 구역별로 각 가정을 심방하실 때 사람들이 수백 명씩 무더기로 따른다 하여 붙여진 별칭, 영적 수도 공사라고도 하셨음.)을 하신다며 같이 가자 하시니 저는 계속되는 행운에 기쁨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돈암동제단에서 예배를 인도하시며 이사야 41장의 동방의 1인에 대해서 조목조목 쪼개시는데 ‘땅 끝, 땅 모퉁이, 동방의 해 돋는 곳에 오신 동방의 1인’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동방의 1인은 타작마당에서 도리깨를 쥐고 밀알 까부르듯 까불어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존재라 하실 때, ‘그래,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때니 이제 1초가 바쁘다. 우리 마을에도 전도관을 세우자.’ 하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을에도 전도관 세우자`
임실전도관 개관 집회 열였을 때
향취와 이슬은혜 한없이 쏟아져

남동생은 밤을 꼬박 새워서 설교집 표지에 있는 하나님 사진을 정성껏 그려 액자에 모셔 놓았고, 목재소에서 간판 목재를 다듬어 “임실전도관”이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6, 70명 정도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1957년 6월 2일 처음으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동네 한가운데 있는 전도관에서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니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임실 장로교회의 주동 장로는 저에게 자기네 교인을 일절 건드리지 말라고 하였고, 또 교인들에게는 저를 보지도 말고 만나지도 말라고 주입시켰습니다. 그런 핍박 속에서도 임실 장로교회 교인들 20명이 스스로 찾아와서 한꺼번에 전도되었습니다. 전도사님을 모시고 ‘임실전도관 개관집회’를 열었을 때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제단에 가득하였고, 집회 첫날부터 향취와 이슬은혜가 한없이 쏟아졌습니다.

얼마 후 협회에서 연락이 오기를, 하나님께서 구례 산판에 가셨다가 오시는 길에 혹시 시간이 되시면 임실전도관에 들르실지 모른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날아오를 듯 기쁜 마음에 한 명이라도 더 데려와서 하나님을 뵙게 하려고 동분서주하다가 돌아왔더니, 어머니 말씀이 하나님께서 시간이 없으셔서 생명물 축복만 하시고 곧바로 기차역으로 떠나셨다고 했습니다. 같이 있던 사람들과 있는 힘을 다해서 역으로 달려갔더니 서울행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열차 맨 뒤 칸에 서신 하나님께서 먼저 저희를 보시고는 미소를 지으시며 하얀 손수건을 흔들어 주고 계셨습니다. 열차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내내 손수건을 흔들어 주셨고, 저희들은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바라보다가 못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진하옥 집사(신앙체험기 349회 / 9집 수록)

■ 강원도 영월전도관

“안찰을 받고 용기백배하여 제단 건축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62년 영월제단 전도사로 발령받은 저는 제단을 건축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제단을 이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제단이 주택지와 멀었기 때문에 전도를 위해서는 읍내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영흥리에 부지를 마련하고 건축 허가를 영월군청에 신청하였으나 신청에 아무런 하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허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단 부지 근처의 천주교회에서 전도관 건축을 반대하고 나섰으며, 그 동네에 사는 신문사 기자는 주민들의 연서를 받아 전도관 건축을 반대하는 진정서까지 제출하였습니다. 그들은 전도관이 번화한 읍내에 세워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건축 허가를 받아야 된다는 생각에 건설과장을 만나기 위해 갖은 애를 써 보았지만 이리저리 피하기만 할 뿐 상대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건설과장 집 앞에서 기다렸다가 간곡히 부탁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 봐도 해결되지 않고 이 문제로 인해 3개월 동안 고심을 하면서 그 괴로움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축복일이 다가와 하나님을 뵈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걱정되고 송구스러웠습니다. 덕소신앙촌에 도착하여 축복일예배를 드리기 전에 하나님께 눈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울면서 “영월에서 제단을 읍내 주택가로 이전하려고 하는데 뜻대로 안 됩니다. 군청의 건설과장은 상면조차 안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래.” 하시고는 잠시 후 “가라, 이제 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 힘과 용기가 솟아올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축복일예배를 드린 후 다음 날 영월에 돌아왔더니 영월군청으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군청에 갔더니 그렇게 만나기 힘들었던 건설과장이 저를 보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동안 수고했죠.” 하는 것이었습니다. 건축 허가가 나왔다는 말에 감격과 감사함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제단 건축을 서두르겠습니다.’ 하며 용기백배하여 제단 건축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제단을 반대하던 신문사 기자가 험상궂은 청년들을 동원하여 건축을 방해하려는 일도 있었으나, 당당한 태도로 일을 계속하니 결국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제단은 순조롭게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정국모 퇴임 관장(신앙체험기 383회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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