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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증거

발행일 발행호수 2491

지난 9월 다윈의 편지가 세상에 공개됐다. 1880년 11월 24일에 쓰인 지 135년 만에 빛을 본 것이다. 진화론을 주장한 과학자 다윈의 종교적 견해가 담긴 편지는 세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나는 성경을 신의 계시라 믿지 않으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지 않는다.” 간단하고 명쾌한 이 편지는 “다윈 당신은 성경을 믿는가?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해 달라.”는 독자의 요청에 응한 것이다. 하지만 다윈은 이 편지를 비밀에 부쳤을 뿐 아니라 일생 동안 종교적 견해를 밝히는 것을 극히 꺼렸다. 그는 노트에 ‘한때의 천문학자가 받았던 박해를 명심할 것’이라고 썼다. 과학적 사실로 종교에 맞섰던 선배 과학자들이 이단 심판을 받거나 화형을 당한 일을 기억한 것이다.

과학자로서 다윈의 삶은 객관적 증거를 찾는 여정이었다. 1831년 비글호에 승선한 다윈은 5년 동안 남아프리카 해안과 갈라파고스 제도를 항해하며 수많은 표본을 수집했다. 1,529종의 생물을 알코올에 담가 보존하고 3,907종의 생물 피부와 뼈로 건조 표본을 만들었다. 이를 토대로 생물 진화를 고찰하기 시작했지만 ‘종의 기원’을 출판한 것은 그로부터 무려 23년 후였다. 그만큼 자신의 이론을 철저히 검증했다. 반론을 세우고 방증을 수집하는 역사과학적 방법은 다윈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증거에 의해서만 주장했던 그는 자신의 가설을 반박하는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면 순순히 가설을 철회하고 증거에 입각한 가설을 다시 세웠다. 다윈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증거뿐이었다.

그런 다윈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은 필연적인 결론이었다. 동정녀 탄생 설화를 비롯한 예수의 행적은 2,000년 동안 기독교의 근간이 되었으나 과학자로서 아무 증거도 없는 설화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천문학자인 지오다노 부르노는 지동설을 주장하다 교황의 명령으로 화형을 당했지만 “나보다 교황이 두려움을 느낄 것”이라며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신봉하는 교리에 맞서 다윈이 객관적 사실을 추구한 것은 과학자의 소신 때문이었다. 요컨대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과학적 증거가 있었다면 다윈의 편지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예수를 전면 부정하는 다윈의 편지가 공개된 후 그에 대해 답변이라도 하듯 교황 프란치스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언급했다. ‘하나님의 아들도 노숙자’라는 발언으로 머물 곳이 없는 가난한 노숙자들을 위로했다 한다.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니 하나님의 아들도 노숙자’라는 발언은 정작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전제에 대한 입증을 교묘히 회피한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화려한 카메라 플래시 세례 속에 노숙자를 포옹하는 모습을 연출했지만 이는 증거와 사실을 묻는 다윈에게 동문서답일 뿐이었다. 자칭 신의 대리인이라면 영혼의 위로를 가장한 쇼맨십이 아니라 객관적 증거로 과학자를 압도할 수 있어야 한다. 칸트가 간파한 대로 과학 없는 종교는 맹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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