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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 탐구 <5> 노아 홍수 이야기의 뿌리를 찾아서(上)

세계 종교 탐구 <5>
발행일 발행호수 2598

<자료1> 뉴욕타임즈 이라크 유물 반환 기사 지난 8월, 미국이 1만 7천 점에 달하는 유물을 이라크로 반환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뉴욕타임즈 1면 을 비롯한 세계 유수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번에 반환되는 유물 중에는 불법 반출되어 성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길가메시 서사시 점토판’이 포함되어 있어 더욱 화제가 되었다. (출처: 뉴욕타임즈)

최근 ‘길가메시 서사시’에 관한 기사가 미국 뉴욕타임즈와 AP 통신, 영국의 더 타임즈 등 유수한 언론에 보도되며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가 기록된 점토판은 원래 이라크에 있었으나 1990년대 불법 반출된 후 여러 곳을 거쳐 미국 워싱턴의 성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이라크로 반환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자료1>

미국에서 이라크로 반환되는 유물이 1만 7천 점에 달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라크 문화부 장관은 “길가메시 서사시를 돌려받는 것이 이라크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반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길가메시 서사시’가 성경 박물관에 넘어갈 때 가로 15cm, 세로 12cm에 불과한 작은 점토판이 160만 달러(19억 원)에 거래된 점을 보면 길가메시 서사시에 집중된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메소포타미아(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지역, 현재 이라크와 주변국 일부에 해당함) 문명의 유산으로 ‘인류 최초’라는 타이틀을 여러 개 가진 작품이다. 이전까지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졌던
‘오디세이(서기전 700년대 작품)’보다 1,400년을 앞선 ‘인류 최초의 서사시’이며,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고뇌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구가 묘사되어 현대에도 큰 울림을 주는 ‘인류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길가메시 서사시는 성경의 노아 홍수 이야기와 너무나 흡사한 ‘대홍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 국가의 특별한 관심을 받아 왔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길가메시의 우정과 모험, 전쟁과 업적 등 다양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대홍수 이야기가 기록된 점토판이 가장 먼저 해독되면서 단번에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발굴하고 연구한 것은 기독교 국가인 유럽과 미국이었기 때문에 이 나라들은 성경 속의 노아 홍수 이야기가 수천 년 전의 점토판에 기록되었다는 점에 엄청난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메소포타미아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길가메시 서사시가 발굴되고 해독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노아 홍수 이야기의 뿌리를 찾아보기로 한다. 지금부터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자료2> 니네베 도시가 표시된 메소포타미아 지역 지도
니네베는 성경에서 ‘니느웨’라고 기록된 곳으로 선지자 요나 이야기의 무대이자 탐험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고대 도시였다. 니네베는 주황색으로 표시된 메소포타미아 지역 중 티그리스 강 근처 이라크 북부에 위치해있다.

<자료3> 니네베의 유적 (출처:https://oi.uchicago.edu/gallery/archaeological-site-photographs-mesopotamia-ninevah#nineveh21.png)

1872년 가을, 영국 국립 박물관의 수장고에는 조각 난 점토판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것은 영국 탐험가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1817~1894)가 조직한 발굴팀이 1850년 메소포타미아의 중요한 유적지 니네베에서 발굴한 것들이었다. 니네베는 성경에서 ‘니느웨’라고 기록된 곳으로 선지자 요나 이야기의 무대이자 탐험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고대 도시였다.<자료2,3> 실제로 니네베 유적지에는 요나의 무덤이 있고 ‘니네베 성’이라는 뜻의 ‘칼라누니아’ 언덕도 있었다.

니네베는 융성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대 도시답게 왕립 도서관(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이 있었고, 이 도서관은 수만 개의 점토판이 각 학문별로 분류된 지식의 보고(寶庫)였다.<자료4> 그러나 발굴 당시에는 이 기록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발굴팀은 수천 년간 흙더미 속에 묻혀 있던 니네베를 찾아내고 도서관을 발굴했지만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자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2만4천 개에 이르는 점토판을 한꺼번에 합쳐서 통에다 포개 넣고 포장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영국 해군 함정에 실어 보냈고, 점토판이 영국 국립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는 여기저기 금이 가고 부서져 어지럽게 널려진 상태였다.

<자료4> 영국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의 점토판들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은 체계적으로 목록과 장서를 갖춘 최초의 도서관으로, 예술과 문학을 애호했던 아슈르바니팔 왕의 명상을 위한 개인 장서로 구성되었다. 이 자리에서 발굴된 2만여 점의 점토판은 신화·문화·역사·의학 등에 걸쳐 있으며, 지금은 영국 국립 박물관에 수장되어, 메소포타미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출처: 영국 국립 박물관 블로그)
<자료5> 조지 스미스(1840~1876)
조지 스미스는 길가메시 서사시 점토판을 최초로 해독한 인물이다. 그는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점토판에서 ‘노아의 홍수’와 동일한 구절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성경보다 앞서 쓰여진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의 일부였다.
(출처: https://www.baslibrary.org/sites/default/fil
es/bsbr210103800l.jpg)

영국 국립 박물관의 연구 보조원 조지 스미스(1840~1876)<자료5>는 이 점토판 더미 속에서 부서진 조각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업무를 맡았다. 원래 지폐 조판공이었던 그는 메소포타미아 연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인정받아 박물관에 채용된 인물이었고, 특히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는 80여 개의 점토판 잔해들을 이어 붙인 후 이런 내용을 볼 수 있었다.

Alles, was ich hatte, nahm ich mit, den ganzen Ertrag meines Lebens
lud ich ein in das Fahrzeug;
Familie und all die Verwandten,
die Tiere des Feldes, das Vieh von der Weide und Leute vom Handwerk,
alle schiffte ich ein.
Ich bestig das Farzeug und verschloß die Tür…
Sechs Tage und sechs Nächte lang
schwollen strurm und Fut, herrschte Orkan über das Land.

대홍수에 대한 기록이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 11번째 점토판
길가메시 서사시가 기록된 점토판은 총 12개인데, 그 중 11번째 점토판에는 대홍수에 대한 기록이 있다. 우트나피쉬팀이 신의 명을 받고 ‘생명의 보호선’이란 배를 만들어 일가족과 동식물을 태우고 대홍수에서 살아남는다. 또 물이 빠진 것을 확인하기 위해 비둘기와 제비, 까마귀를 차례로 날려 보냈는데 비둘기와 제비는 머물 곳을 찾지 못해 돌아오고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자 배에서 내렸다고 한다. (출처: 위키미디어)

Als der siebente Tag anbrach, da legte sich der Strurm,
sanft wurden die Wogen, der Sturmwind ließ nach,
und die Flut stieg nicht mehr.
zu Lehm alle Menschen geworden!
Bis zum Berge Nissir gelangte das Fahrzeug,
am Berge Nissir fuhr es auf und stand wie verankert…
Als der siebente Tag anbrach,
entsandt’ ich eine Taube, ich schickte sie aus…

“내가 거기에 실은 것은 이 세상 모든 생명체 …

나는 내 가족과 친척들에게도 배에 타라고 했다.
들판의 짐승들과 들판의 가축들과 …
나는 배에 올라 문을 걸어 잠갔다 …
엿새 낮과 밤 동안
바람과 홍수가 기승을 부려대고,
폭풍우가 온 땅을 집어 삼켰다.
이레째 되는 날 새벽, 마침내 폭풍우가 잦아들고 …
홍수가 그쳤다.
바다도 잠잠해졌다.
온 인류가 진흙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
배는 니트시르 산 정상에 걸쳐져 있었다.
트시르 산은 배를 품어 안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이레째 되는 날,
나는 비둘기 한 마리를 날려보냈다 …”

( 위는  길가메시 서사시 내용의 원문으로, 악카드어로 쓰여진 점토판의 내용을 독일어로 해석한 것이다.
출처: C. W. Ceram, 『Götter, Gräber und Gelehrte』, Deutsche Buchgemeinschaft, 1955, 292-293p.)

조지 스미스는 평소에 차분하기 그지없는 점잖은 청년이었지만 이 대목을 읽고 흥분한 나머지 방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2,000년 동안 잊혀졌던 기록을 내가 처음으로 읽었다!” 조지 스미스가 그토록 흥분하고 감격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847년 6월 26자 <도해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
1847년, 선으로 그린 삽화가 실렸던 잡지 <도해 런던 뉴스>에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 본 당시 영국인들은 영국 국립 박물관에 모여들며 큰 관심을 보였다. (출처: https://books.google.co.kr/books?id=1dFCAQAAIAAJ&redir_esc=y, 412p)

조지 스미스가 ‘2,000년 동안 잊혀졌던 기록’이라고 했던 것은 성경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홍수 이야기 점토판을 발견하고 그토록 흥분했던 것은 그것이 성경의 노아 홍수 이야기라고 단정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메소포타미아는 아브라함을 비롯해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활동한 무대였기 때문에 그 땅 밑에서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점토판이 성경의 기록일 것이라고 유추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영국을 비롯한 기독교 국가들이 메소포타미아 발굴과 연구에 그토록 많은 시간과 인력과 자원을 투자한 이유도 성경의 무대를 발굴한다는 종교적인 열망이 큰 원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1872년 12월 3일, 조지 스미스가 런던 성서 고고학회에서 ‘점토판에 기록된 대홍수 이야기’를 발표하자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을 비롯한 청중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발표는 엄청난 화제가 되어 조지 스미스는 일약 전 국민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조지 스미스의 발굴과 연구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조지 스미스가 대홍수 점토판에 누락된 부분을 찾기 위해 니네베로 떠날 때 모든 경비를 지원할 정도였다. 또한 조지 스미스가 발굴 작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데일리 텔레그래프(1873년 5월 21일자)>에서 발굴 작업을 자세히 소개하고 대홍수 점토판에 관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를 환영한다는 기사를 실었다.<자료6>

<자료6> 1873년 5월 21자 <데일리 텔레그래프>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1873년 조지 스미스가 대홍수 점토판에 누락된 부분을 찾기 위해 니네베로 떠날 때 모든 경비를 지원했으며, 1873년 발굴 작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그의 발굴 작업을 자세히 소개하고 대홍수 점토판에 관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를 환영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출처:https://www.britishnewspaperarchive.co.uk/)

조지 스미스 이후로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을 성경과 연결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영어와 독일어 등으로 발간된 저작물을 보면 《설형문자 비문과 구약성서》, 《고대 오리엔트의 텍스트와 구약성서의 이미지》, 《고고학과 성서》 등이 있는데, 조지 스미스가 점토판에서 노아 홍수 이야기를 찾아낸 것처럼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에서 성경 이야기를 찾으려고 하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이 곧 성경의 이야기라고 전제하는 것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점토판의 내용이 성경과 유사하다 하더라도, 아직 점토판의 제작 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의 기록과 성경이 동일한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점토판의 제작 연대를 알기 위해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여러 가지 고대 문자를 완벽히 해독해야 했지만, 고대 문자 해독은 100여 년에 걸쳐 수많은 학자와 천재들이 도전하는 중으로 그때까지 완전한 해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지 스미스가 읽었던 길가메시 서사시는 악카드어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악카드어의 정확한 발음과 문법까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악카드어와 유사한 고대 언어에 능통했던 조지 스미스는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해 길가메시 점토판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악카드어가 완전히 해독되고 그 사용 시기를 밝히게 된 것은 1905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때는 이미 조지 스미스가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그는 길가메시 서사시가 언제 기록되었으며 점토판이 제작된 시기가 언제인지 알지 못했다. 만약 그가 점토판의 제작 연대를 알았다면 2,000년 동안 잊혀졌던 노아 홍수 이야기를 자신이 처음으로 읽었다고 흥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읽었던 길가메시 서사시는 서기전 600년대에 기록된 것으로, 서기전 400년대에 기록된 성경보다 200년 앞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판본으로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 중에서 조지 스미스가 읽었던 판본은 가장 나중에 제작된 것이었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지금부터 4,100년 전에 쓰인 것으로, 성경보다 1,700년 앞선 것이었다.

이 같은 제작 연대는 고대 문자를 해독하고, 그 사용 시기를 규명하며, 동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연대를 교차로 검증한 후에야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점토판의 제작 연대를 밝히는 것은 한마디로 고고학과 역사학이 총동원되는 과학적인 작업이었다.

점토판의 제작 연대가 밝혀지면서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이 성경보다 훨씬 앞선다는 것이 알려졌는데, 이는 기독교 국가들을 일대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었다. 이 충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 1902년 독일에서 있었다.

<자료7,8> 델리취 교수와 ‘바벨과 성경’ 강연집
프리드리히 델리취 교수는 독일 베를린대학 교수이자 메소포타미아 연구의 권위자였다. 1902년 델리취 교수는 ‘바벨과 성경’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성경보다 훨씬 앞선 시기의 기록이 나타났기 때문에 성경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라는 믿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성경은 앞선 시대의 기록에 영향을 받았을 뿐이며 유일한 신의 계시로 간주될 수 없다.”고 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https://www.abebooks.com/Babel-Bibel-Friedrich-Delitzsch-Leipzig/30337961233/bd)

1902년 1월 13일, 독일 베를린대학 교수이자 메소포타미아 연구의 권위자인 프리드리히 델리취 교수(1850~1922)<자료7>가 강연을 하게 되었다. 독일 동방학회에서 ‘바벨과 성경’이라는 주제로<자료8> 이루어진 이 강연에 각계 유명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청중 중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도 있었다.<자료9> 이날 델리취 교수의 파격적인 발언으로 인해 강연은 역사에 남을 사건이 되었다.

델리취 교수는 성경보다 훨씬 앞선 시기의 기록이 나타났기 때문에 성경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라는 지금까지의 믿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성경은 앞선 시대의 기록에 영향을 받았을 뿐이며 유일한 신의 계시로 간주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의 권위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다.(헨리에타 맥컬, 『메소포타미아 신화』, 범우사, 1998.,29p.)

<자료9,10> 빌헬름 2세와 1903년 2월 19일자 <그렌츠보텐>
1902년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사진과 1903년 그가 기고한 글이 실린 주간 평론지 <그렌츠보텐>. 빌헬름 2세는 기고문을 통해 종교는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델리취 교수가 성경과 계시의 문제에 논쟁적으로 접근했던 것을 커다란 실수라고 비난하는 글을 썼다(출처: 위키피디아, 브레멘 주립 및 대학 도서관)

그의 강연은 청중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황제인 빌헬름 2세는 기고문을 통해 종교는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델리취 교수가 성경과 계시의 문제에 논쟁적으로 접근했던 것을 커다란 실수라고 비난하는 글을 썼다.<자료10>(주간 평론지 <그렌츠보텐>

<자료11> 1903년 2월 25자 <더 타임즈>
1903년 타임즈지에 델리취 교수의 동료 연구자 체드 보츠카인의 기고문이 실렸다. 1902년 강연이후로 델리취가 감히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가설에 대해 의견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베를린대학에서 쫒겨날 위기를 겪고 있다고 했으며, 빌헬름 황제가 델리취 교수를 힐난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https://www.newspapers.com/)

1903년 2월 19일자) 또한 델리취 교수의 동료 연구자 체드 보츠카인이 더 타임즈(1903년 2월 25일자)에 기고한 글을 보면, 황제가 델리취 교수를 힐난한 것을 알 수 있다.<자료11> 기고문에 따르면 황제는 델리취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성경에는 구세주인 예수에 대한 계시가 없다고 주장한다.(He does not admit the Divinity of Christ; and therefore he alleged, carrying the argument back to its bearings upon the Old Testament, thus that book does not contain any revelation referring to Christ as the Messiah.)’며 델리취에 대한 비난을 계속했다.

강연 이후 델리취 교수는 베를린대학에서 쫓겨날 위기를 겪고 어려움에 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동료 체드 보츠카인이 더 타임즈 기고문에서 ‘델리취 교수가 감히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가설에 대해 의견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위기에 처했으니 많은 도움을 바란다.’며 지원을 요청할 정도였다. 이 사건을 통해 성경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 아니며 성경보다 앞선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 기독교 국가에 얼마나 큰 충격을 몰고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이 성경보다 앞섰다는 사실은 어떤 과정을 통해 밝혀지게 되었을까. 그 기록이 성경과 유사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해 다음번 <세계 종교 탐구>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길가메시의 부조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거대한 길가메시의 부조. 높이는 5.5m. 너비는 2.1m에 달한다. 길가메시는『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인 영웅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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