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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 우뚝 세워질 때 하나님 기뻐하셔

발행일 발행호수 2631

1955년 원효로 구제단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전도관이 개관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는 소사, 덕소, 기장, 세 곳에 신앙촌이 건설되며 신앙의 구심점이 되어 1970년대까지 전도관 개관이 국내외로 확대되었습니다. 1976년 3월, 미국 L.A에 전도관 건물이 마련되었으며, 그 이후로 콜로라도 주 덴버시, 텍사스 킬린, 뉴욕, 워싱턴 등 여러 곳에서 전도관이 개관되었습니다.

1980년대 초에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전하며 천부교회에 구원을 상징하는 비둘기상을 높이 세웠습니다. 1990년대는 활발한 전도 활동과 함께 초창기부터 건설되었던 각 교회들의 재건축 시점이 맞물려, 전국 천부교회의 신·개축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 성전을 건축하고 가꾸는 것은 전도의 첫걸음이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이번 특집에서는 교회를 건축하고 가꾸는 일에 마음과 정성을 쏟은 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 건설 일을 도우면서 은혜 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1957년에는 영주동 산꼭대기에 터를 마련해 제단 건물을 신축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일을 돕는 속에서 저도 직장에서 근무를 마치면 곧장 영주동으로 달려가 건설 일을 도왔습니다. 요즘 같은 건설 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질통을 지고 벽돌이며 모래를 날랐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질통을 지고 종각 꼭대기까지 뛰다시피 오르내렸습니다. 한번은 모래를 나를 때 질통이 전혀 무겁지 않아서 모래가 덜 담겼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모래를 담아 주는 사람이 “이렇게 가득 채웠는데도 무겁지 않아요?”라고 해서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귀한 성전을 짓는 곳에서 열심히 일할 때 순간순간 향취가 진동하며 몸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고 마음 또한 한없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기장신앙촌 이숙녀 권사)

청주 전도관 건축에 쓰일 돌을 질통에 지고 있는 모습(1957년 경)

■ 교회 신축을 기도 제목으로 삼고 진심으로 간구하고 움직였을 때 느낀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971년 대지를 마련해 정릉제단을 신축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점점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저는 진실되게 마음을 모으는 것이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완공되기까지 교회 신축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 진심으로 간구하게 되었고, 일을 통해 신앙이 자랄 수 있기에 다른 어떤 일보다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살림이 넉넉했던 저는 좋다는 곳을 구경 다니고 귀한 물건을 마음대로 사기도 했지만,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움직일 때 느끼는 그 기쁨과 즐거움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L.A.교회 최경희 승사)

■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는 성전이 우뚝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지금의 안양제단이 세워지기 전인 1981년, 그때는 안양제단이 산 언덕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가파른 곳에 있다 보니 특히 나이 많은 권사님들께서 오르락내리락하느라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교인들이 힘을 모아 국도 옆 평지이고 교통이 편리한 곳에 다시 교회를 신축하였고, 종각에는 비둘기를 높이 달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신축 직후 기장신앙촌에 다녀온 전도사님 말을 들으니, 그날 하나님께서 전도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이 땅 위에 최초로 비둘기 종각이 달린 교회가 세워진 날이다”라며 무척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수원교회 정창교 권사)

■ 성전 건축에 수고를 아끼지 않은 사람들에게 안수와 안찰을 해 주셨습니다.

1958년 2월경 소사신앙촌에 도착해 보니 1구역의 주택이 지어진 상태였습니다. 그 후로 주택 단지와 아파트, 공장들도 속속 건설되었습니다. 건설대에서 제가 맡은 일은 모래와 자갈, 시멘트를 혼합하여 콘크리트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처럼 건설 장비가 있는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의 힘이 많이 필요하여 모두들 열심히 일했습니다. 매일 새벽 단잠에서 깨어나면 전날의 피곤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솟아올라 활기차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현장에 나오셔서 격려해 주시고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건설대원 말고도 신앙촌 주민들이 현장에 나와서 일을 돕는 때가 많았는데 그 사람들도 빠짐없이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건설대원들을 안찰해 주셔서 저는 처음으로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앞에서 안찰받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어떤 사람은 발버둥을 치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배 위에 살짝 손을 대실뿐이었지만 웬일인지 몹시 아픈 것 같았습니다. 제 차례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두 손이 배에 닿자마자 얼마나 아프던지 고함을 치며 팔다리를 버둥거렸습니다. 어찌나 세게 팔다리를 휘둘렀는지 곁에 있던 사람들이 저를 붙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집과 혈기가 다 빠져야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찰을 받고 나와 옷을 들춰 보니 배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옷 위에 손을 가만히 대시며 안찰하셨는데 그렇게 아프고 손자국까지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하나님께서는 건설대원들을 자주 안찰해 주셨습니다. 저는 안찰을 받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렇게 심하던 통증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안찰을 받고 나면 온몸이 시원해지고 하늘 공중으로 올라갈 듯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안찰을 통해 성신으로 죄를 씻어 주시며, 내 속의 죄가 성신에 대항할 때 통증을 느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그해 겨울이 다가올 무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설대원들을 유치원 건물에 모이게 하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죄 짐을 지셨네∼” 하는 찬송가 192장을 오랫동안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간절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를 때 머리 위로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건물 안에 있었지만 한여름 소나기를 맞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은혜를 허락해 주신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덕소교회 이경수 승사)

■ 교회를 지은 공로로 안찰을 받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1960년대 초에 사라호 태풍으로 영주동 제단이 큰 피해를 입어, 1964년도에 대신동 제단을 새로 짓게 되었습니다. 개관집회가 끝나고 건축에 공로가 큰 건설대원에게 하나님께서 안찰을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안찰실로 들어가서도 예전에 지었던 죄로 덜덜 떨면서 기다리다 자리에 누웠는데, 하나님께서 두 손을 제 눈에 대시자 어찌나 뜨거운지 그만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배를 안찰하시려고 하자 배에 손이 닿기도 전인데 뱃속에서 이상한 뭉치들이 불룩불룩 요동치면서 하나님의 손을 피해 이쪽 저쪽으로 도망을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집사님, 이거 빼지 않으면 지옥 가요” 하시며 손을 올리시면 저의 등은 활처럼 휘었고, 동시에 뱃속의 창자를 도려내는 듯한 고통에 다시 “으-악” 하며 죽는다고 소리소리 질렀더니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도 겁에 질려 덩달아 회개하며 대성통곡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뱃속에 있던 것이 빠져나가고 나니까 어머니 품속에서 잠자는 것 같이 포근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꽤 오래 잔 것 같은데 “그만 일어나시죠.” 하시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제 뒷사람이 안찰을 받고 있었습니다. 일어나 나가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집사님의 죄를 사해줬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너무 고맙고 감사하여 억제할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안찰실을 걸어 나왔습니다. (소사교회 이차봉 권사)

송탄 전도관 건설을 돕고 있는 사람들(1960년대)

■ 어떠한 공로도 헛된 것은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건축을 도운 사람들을 기억해 주셨습니다.

덕소신앙촌에서 저는 건설대로 일했습니다. 건설대 사람들은 힘든 일을 먼저 하려고 했기 때문에 가벼운 모래 짐보다 무거운 자갈 짐을 서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터를 파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아주 좋은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주변에는 일하는 사람들뿐이고 공사장에서 그런 향기가 날 리 없는데 좋은 향기가 맡아지니 저는 ‘은혜를 주시나 보다’ 하며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건설대 대장이 “모두 나와서 줄을 서세요!” 하고 외치는 소리에 주변을 둘러보니 하나님께서 오셔서 건설대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줄을 서자 하나님께서는 한 명 한 명에게 안수를 해 주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1985년 무렵부터는 청주제단에 다녔는데 언젠가 한번은 청주제단 권사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장신앙촌이 완공된 후에 하나님께서 소사와 덕소, 기장신앙촌에서 건설대로 일했던 사람들을 모두 기장신앙촌으로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분도 건설대로 일한 적이 있어서 모임에 갔더니, 하나님께서 건설대원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직접 기념품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그래요? 저도 건설대에서 일했는데 그런 모임이 있었는지 몰랐네요”라고 했더니, 모임에서 출석을 부를 때 제 이름도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운혜” 하고 불러도 나오지 않자 하나님께서 “일할 때 노란 수건을 잘 쓰던 사람인데” 하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건설대에서 일할 때 머리가 헝클어질까 봐 수건을 곧잘 썼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작은 부분까지 기억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환하게 웃으시며 건설대원들에게 안수해 주시던 하나님의 모습이 떠올라 어느새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2001년에 제가 기장신앙촌에 입주했을 때였습니다. 총무부에서 제 이름이 적힌 기념품이 보관돼 있다며 주었는데, 20여 년 전 건설대 모임에서 주셨던 바로 그 수건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포장지는 빛이 바랬지만 “김운혜”라는 제 이름이 분명히 쓰여 있었습니다. 기념품을 받으면서 감사한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저는 건설대로 일했던 그때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기장신앙촌 김운혜 권사)

■ 교회를 건축하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일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1962년 영월제단 전도사로 발령받은 저는 제단을 건축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제단을 이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영월제단이 주택지와 멀었기 때문에 전도를 위해서는 읍내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영흥리에 부지를 마련하고 건축 허가를 영월군청에 신청하였으나 신청에 아무런 하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허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단 부지 근처의 천주교회에서 전도관 건축을 반대하고 나섰으며, 그 동네에 사는 신문사 기자는 주민들의 연서를 받아 전도관 건축을 반대하는 진정서까지 제출하였습니다. 그들은 전도관이 번화한 읍내에 세워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건축 허가를 받아야 된다는 생각에 건설과장을 만나기 위해 갖은 애를 써 보았지만 이리저리 피하기만 할 뿐 상대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건설과장 집 앞에서 기다렸다가 간곡히 부탁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 봐도 해결되지 않고 이 문제로 인해 3개월 동안 고심을 하면서 그 괴로움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축복일이 다가와 하나님을 뵈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걱정되고 송구스러웠습니다. 덕소신앙촌에 도착하여 축복일 예배를 드리기 전에 하나님께 눈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울면서 “영월에서 제단을 읍내 주택가로 이전하려고 하는데 뜻대로 안 됩니다. 군청의 건설과장은 상면조차 안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래” 하시고는 잠시 후 “가라, 이제 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 힘과 용기가 솟아올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축복일 예배를 드린 후 다음 날 영월에 돌아왔더니 영월군청으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군청에 갔더니 그렇게 만나기 힘들었던 건설과장이 저를 보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동안 수고했죠” 하는 것이었습니다. 건축 허가가 나왔다는 말에 감격과 감사함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제단 건축을 서두르겠습니다’ 하며 용기백배하여 제단 건축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제단을 반대하던 신문사 기자가 험상궂은 청년들을 동원하여 건축을 방해하려는 일도 있었으나, 당당한 태도로 일을 계속하니 결국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제단은 순조롭게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부산 영도제단에 발령을 받아 갔을 때는 제단을 신축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영도제단의 이 장로님이 “전도사님! 준비가 잘되고 있으니 건축 허가를 신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여 부산시청을 찾아갔더니 담당 직원이 아주 친절하게 맞아 주며 일주일 만에 건축 허가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건설을 진행하는데 이 장로님이 건축 자재를 마련하고 인부들과 함께 공사를 진행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일을 도와서 일사천리로 깨끗한 제단이 완공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영월에서 한고비를 넘겼더니 이렇게 도와주시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며 하나님께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1968년경에 제가 서울 4중앙 산하의 당산제단에서 시무할 때였습니다. 당시 서울 4중앙은 웅장한 제단을 완공하고 신축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모을 때여서 저도 성심껏 그 일을 도왔습니다. 그러던 중 덕소신앙촌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었을 때 안찰을 해 주시며 “열심히 일해”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나와 걸어가는데 온몸이 솜털처럼 가벼워서 두 발이 땅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둥둥 떠오르는 느낌이었고, 덕소신앙촌 주변을 흐르는 한강 위로 훨훨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느낌이 너무도 분명하고 생생하여 ‘이렇게 귀한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장신앙촌 정국모 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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