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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광수 관장 편 (41) 천부교 성지 지킬 때 기사이적 일어나

천부교 성지 수호를 위해 전국 교인들 동참
발행일 발행호수 2412

제가 한일물산(주) 사장을 맡고 있을 때, 우리나라는 경제 개발 과정에서 많은 외국 자본을 썼으나, 외환 관리 정책을 잘 펼치지 못하여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고, 국가 신용도가 떨어지며 국제적 경제 활동에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서 결국 1997년 12월 3일 국제 통화 기금(IMF) 등 국제 금융 기구로부터 외화를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제 위기 극복에 함께 동참하기 위해 1997년 12월 13일 시온그룹 범시민운동실천다짐 대회를 열어, 모든 생활을 검소하게 하고 각 회사와 공장에서는 자제를 절약하자는 등의 실천 사항과 결의문을 낭독, 절약 방법 등을 발표하였습니다.

1998년 1월 4일부터 건강 증진을 위해 신앙촌의 전 주민과 종업원들이 새벽예배를 마친 후 아침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신앙촌의 전 주민들과 입사생, 소비조합원들은 매일 아침마다 신앙촌 산책로를 걷거나 달리며 활기차고 건강한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앙촌의 사원들과 주민들의 휴식공간이자 건강한 먹거리를 판매하는 맛길, 베이커리, 통나무집 등은 무인판매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곳은 초창기 1958년 소사신앙촌에 있던 주인없는 상점(무인판매)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당시 주인없는 상점에서는 사람들 모두가 자유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주인이 없어도 저녁에 물건값을 계산해보면 1원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았다고 합니다.

1999년 12월 30일에는 신앙촌의 왜곡보도에 대한 항의 방문으로, 해운대와 기장 지역에서만 발행되는 지방신문인 ‘열린신문’의 강욱진 편집위원을 만나 잘못된 보도에 대해 강력 항의하고 사과문을 받았습니다.

2000년 1월 1일
이슬성신이 신앙촌에
내리는 장엄한 모습을
조선일보에 공개해

2000년 1월 1일, 조선일보 1월 1일자 16~17면에 신앙촌에 내리는 이슬성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은 글과 함께 대대적으로 실었습니다. “대망의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결같이 저희 신앙촌 제품을 이용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신앙촌 소비조합원 일동.”

이슬성신이 신앙촌에 내리는 장엄한 사진을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천부교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자긍심을 마음껏 드높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부산시에서 천부교 성지가 있는 신앙촌 지역 내에 동아시아 대회를 위한 체육관 건립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1999년 10월 24일부터 2000년 3월 4일까지 전국의 교인들은 부산시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서 성지를 지키기 위해 동부리로 모여들었습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천부교의 장년과 청년이라면 누구나 동부리 지역을 지키는 일에 참여했고, 그곳을 지키는 동안 교인들은 많은 기사이적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 두 가지 일화만 소개하겠습니다.

말 못하던 변종규 청년
천부교 성지를 지키고자
동부리 지역 근무 중에
말문 트여 말하기 시작해

대구에 사는 변종규 청년은 당시 21세였습니다. 이 청년은 듣기는 하나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집에 전화를 하면 듣기는 들어도 말을 하지 못하니까 항상 동생이 전화를 받고 통화한 내용을 알려 주곤 했습니다. 변종규 청년은 특수장애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 있는 염색공장에서 근무하던 중 동부리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젊은이가 성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변종규 청년은 동부리로 달려 와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동부리를 지키던 어느 날 놀랍게도 갑자기 말문이 트여 말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일로 같이 근무를 하던 교인들도 모두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변종규 청년은 핸드폰을 가지고 다녀도 될 정도로 전화를 받는데 지장없이 편하게 통화가 가능해졌습니다.(오른쪽 아래 사진)

또 한 분은 덕소신앙촌 이대복 권사님의 체험입니다. 동부리를 지켰던 교인 중에 최고령자였던 이대복 권사님은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출신으로, 당시 95세(1906년생)였습니다. 이대복 권사님은 평소 관절염으로 다리가 아파서 펴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늘 엉거주춤한 자세로 계셨는데 동부리 사건이 생기자 천부교인이라면 성지를 지키는 일에 참여해야한다며 동부리로 달려 오신 것입니다. 젊은 사람도 쉽지 않은 일을 이대복 권사님은 기쁘고 감사하게 하셨고 그렇게 근무를 하던 중 굽었던 다리가 펴져서 걷는데 전혀 불편함 없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복 권사님은 2000년 3월 19일 축복일에 전국의 교인들 앞에서 독창을 불러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2003년 2월 24일 6.25 참전 유공자 전북지부 회원 125명이 당시 전주교회 남삼호 관장의 인솔 하에 신앙촌 견학을 했습니다. 세미나실에서 신앙촌 홍보 영상물을 시청하고 생명물 두부 공장, 양말공장 및 수예공장, 판매부, ㈜오리엔스 공장 등을 견학하였습니다. 당시 참석한 참전 유공자 전북지부 회원들은 축복이 내리는 모습이 찍힌 사진도 관람을 하였는데 특히 김재환 전북지부 회장은 “이처럼 하늘의 축복이 있는 곳에 초청해 주어서 고맙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신앙촌 견학이 무척 인상적이었다는 6.25 참전 유공자 전북지부 회원들은 6월 12일 같은 단체 회원 136명과 함께 다시 신앙촌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동부리 사건에 이어 부산시는 1996년 신천리 252번지 일원 약 9000평을 하수종말처리장 후보지로 지정하여 추진을 하였는데 그 중 74%인 6000평에 해당하는 토지가 천부교 성지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부산시가 신앙의 성지에
하수종말처리장 건설추진
반대 서명 운동 벌이고
기장주민 신앙촌 초청견학

2003년 3월 저희는 신앙의 성지에 하수종말처리장 건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불가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전국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신천리로 모여들었습니다. 교역자들은 6월 3일부터는 2인 1조가 되어 기장군 기장 읍내를 돌면서 기장읍 주민들에게 신천리 지역에 하수종말처리장 건립이 기장 지역에 미치는 영향 등을 알리고 신천리 하수종말처리장 설치 반대 서명운동을 시작했습니다. 6월 6일부터는 지방에서 온 교인들도 조를 편성하여 반대 서명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또 7월 3일부터는 기장지역 주민들을 신앙촌에 초청하여 견학도 했습니다.

2003년 9월 28일, 신천리 성지 수호에 대한 결의를 다진 9월 남자축복일 예배를 마치고 기장신앙촌 세미나실에서 청년대학생 신앙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죄가 가장 큰 죄로 하나님의 말씀 대로 절대 순종해야 된다. 하나님은 죄 안 짓는 사람을 귀히 여기신다”는 요지의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 ‘천부교 50년 역사’에 대한 특별강좌가 있었는데 “천막집회, 이만제단, 소사, 덕소, 기장신앙촌 건설로 이어지는 천부교 50년 역사,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며 청년들에게 이 역사를 이어갈 시온의 꼭 필요한 인재가 되어 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신천리 사건이 있던 그때 저는 신앙촌 안에 있는 무연고 묘지를 처리하는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무연고 묘지 이장은 허가를 받아서 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업체 삼덕기업(대표 이영옥)과 계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작업 중에 실수로 유족이 있는 묘를 판 것입니다. 이를 알게 된 유족들은 기장군청에 가서 데모를 하였고 모든 일의 책임자였던 저는 검찰에 소환되어 부산지방검찰청 특수부 1014호실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2일 오후 5시 반경에 긴급 체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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